친구는 썸남이 있다며 만남 전부터 보여주겠다고 했다. 알았노라며 출발할 땐 날씨가 지독히도 추워서 발이 꽁꽁 얼 정도였다. 핫팩으로 녹이며 열차에 타니 온기에 좀 괜찮아졌다.
사실 친구의 썸남을 안 봐도 괜찮았다. 단지 무료한 금요일 오후를 오래된 친구와의 회포를 품으로써 주중의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다. 그렇다고 회사가 엄청 치열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료해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으면 할 만큼 일이 없었고 그런 건 다른 직장에 다녔으면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회한을 주었다.
친구는 전날 대본을 쓰느라 밤을 새우고 내가 오기 전 스케줄을 마치고 쪽잠을 잤다고 했다. ‘거의 다 왔어’라고 하자 ‘전담 꺼내느라 주차장에 있어’라고 한 그녀의 말마따나 롱패딩을 입은 그녀의 실루엣이 보였다. 반가워서 이름 석자를 부르자 그녀는 예의 환한 미소로 돌아보았다.
그녀는 풀메이크업을 채 지우지 않은 상태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가며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하남을 만나고 있는데 술 먹고 집에 찾아오는 거야’라고 해서 ‘그럼 경찰에 신고해야지’를 속으로 삼키고 그 말을 계속 듣기 시작했다. ‘방송후배가 미팅 한 번만 나와달라고 해서 간 적이 있었거든. 근데 다 94 95 이런 거야. 88 사내변호사 빼고. 나는 도착하자마자 월천이하 안 만나요 시전 했는데 그중 한애가 그날 끝나고 인스타로 연락이 오는 거야. 처음엔 씹었지. 근데 계속 밥 먹자 그러는 통에 만나게 됐어. 만나보니까 나름 자기 사업하고 있고 괜찮아서 만났는데 얘가 사귀자고를 안 하는 거야. 왜 안 사귀냐 물었더니 책임지라고 하는 말만큼 무책임한말이 없다며 사귀잔 말은 없더라고.’ 그러더니 그 남자애한테 연락이 왔다. ‘걔보고 아는 사람 데리고 나오라고 했으니 같이 만나보자’라며 그녀는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나 낯가리는 거 알잖아’라고 하자 ‘네가 좀 봐줘. 어떤 앤지’라며 나간 자리엔 사진보다 중후해 보이는 94년생이 있었다. 그녀는 참관자가 된 듯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아서 ‘만나기 전 따발총처럼 말하던 애가 맞나’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는 자기 사업을 한 경위를 말했다. ‘대학생이 되자 가족의 지원이 없어서 어릴 때부터 일을 해야 했어요. 밑바닥부터 시작했거든요. 돈이 없어서 막일 대리운전 하면서 돈을 모아서 토지회사에 들어갔어요. 큰 면적의 토지를 사서 나눠파는 일이었는데 당시 용인땅이 잘됐어요. 당시 누나가 세종에서 필라테스 1호점으로 돈을 꽤 벌었거든요. 그 수강생 중 한 분이 저를 좋게 봤는지 건설업 제안을 해주셔서 감사히 하게 됐죠. 일을 하며 결국 사람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게, 운 좋게 암진단키트 유통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지인의 제안에 한국총판을 맡게 됐어요. 한 번은 미용실에 갔는데 한 사람에게 머리를 4년 맡겼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제안했죠. 매장 내줄 테니 운영해 보겠냐고. 그래서 대학로에서 미용실을 하는데 매출이 꽤 나와요.’라고 그는 말했다.
‘근데 왜 안 사귀는 거예요?’라고 묻자 ‘사람을 못 믿어요. 일 하면서 사람 때문에 잘된 일도 많지만 배신당한 적도 많았거든요. 제가 헤어진 지 1년 반이 넘었는데 그전 연인과도 신중하게 시작해도 결국 끝났어요. 워낙 바쁘기도 했고 지금은 그때보단 안정됐지만 사람을 오래 지켜보다가 만나고 싶어요.’라며 개소리를 했다. 그 새끼는 내 친구를 오래 지켜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런 남자들의 뻔한 수법, 함께 있을 때 몸을 함부로 만지거나 술에 만취되어 집에 찾아오는 행위와 우는 행동은 동정심을 유발해 결국 몸을 취하기 위한 한 방법뿐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욕지기가 차올랐다. 하지만 그 자리에선 ‘아 지나온 이야기 들어보니 이해가 되네요’라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집에 오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가 ‘2차 가자. 얘 자주 가는 바에 킵쿨 있대’라며 설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