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명절은 본가에서 우리 집에 온다. 할머니네도 가지 않고 가족끼리 모여서 밥 먹는 게 편하다. 음식을 할 필요도 없고 가게에서 사 먹고 커피 한잔하고 헤어진다. 진즉에 이럴 것을 친척끼리 모여서 싸우고 음식 하고 여성만 노동하는 게 불합리하다고 느껴졌는데 그냥 참은 것이었다. 이제는 참지 않는다. 그들이 바뀌지 않을 것을 아니까 피하는 것이다. 때로는 피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분명 친척끼리 모일 땐 웃지 않았는데 직계가족만 모이니까 웃는다.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그가 있었으면 이렇게 웃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도 일 안 하니까 웃음꽃이 피고 동생도 잔소리 듣지 않으니까 편하고 나도 가뜩이나 부대끼는 거 싫어하는데 불편한 얼굴들 안 봐서 좋았다.
이야기 들으니 고모딸이 또 수능점수가 안 나왔나 보다. 고모는 우리나라 최고학부 나와서 변호사 하는데 딸 이 서울대가 아닌 연세대를 간다고 해도 아쉬워했을게다. 그래서 재수를 시켰지만 또 점수가 안 나오니 복잡하겠다 싶다. 그 아이가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받았을게 훤하다. 그건 내가 가장 심했다. 집안의 장녀로 자라며 모든 기대와 관심을 받았지만 처음이라서 겪는 수능이나 대학, 취업은 너무 혹독했다. 내게 주어진 기준들이 상향되었다는 걸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시야를 가린 말처럼 달리기만 했다. 그래서 대학생 때 고장 나 버렸지만 동생들이 그런 걸 겪고 있는 걸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수능이 다가 아닌데, 학부 안 좋게 들어가도 본인이 정신 차리면 최고직업이라 일컬어지는 의대도 갈 수 있는데 말이다. 운 좋게 의전이란 제도가 생겼고 주위 성실하던 애들은 그렇게 잘 갔다.
난 수능으로 공부를 놔버려서 전문직이나 고위공무원 공부 자체가 하기 싫었다. 대신 딴생각을 많이 했다. 잡지 에디터 인턴을 붙거나 방황한 게 대학생 때의 내가 한 것들이다. 그러지 않고는 미쳐버렸을 것이다. 다행인지 뭔지 입시가 끝나자 아버지도 그 이후에 대해서는 별 말을 하지 않아서 마음껏 비뚤어질 수 있었다. 이렇게 회사원이 될 줄 알았다면 더 미쳐야 했다. 더 사고 치고 계속 잽을 날려서 뭔가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안정적인 직장만 손에 쥔 채 서른 중반이 되었다.
연휴 내내 쉬면서도 마음 한편을 잡은 건 이 마음이었다. '벗어나야 해' 밑바닥부터 할 수 있다고 마음으론 알고 있는데 실제로 그게 맞는가? 이미 부모님의 기대 같은 건 바닥에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또 다음주가 되면 꾸역꾸역 멱살 잡힌 소처럼 일하러 나갈 생각을 하니 또 속이 답답해져 온다. 명퇴가 가능한 시점을 보니 지금보다 9년을 더 다녀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버리는 내 청춘은? 20년 동안 일하면서 선배가 병을 얻어 나가는 걸 보면서 이미 마음은 떴다.
창업을 한다던 그가 회사 때려치우고 나가는 걸 보며 '무모한 거 아냐?'라고 생각했다. 아이템만 가지고 있지 어떤 실행된 게 無였기 때문이다. 그땐 위험하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제 뭐라도 하진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1년 먼저 그가 시작한 거니까. 아무리 머리털 빠지게 생각해도 나오는 게 맞는데 나는 자꾸만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을 거야' '자영업자 맨날 망한다는 거 안 보여?'라며 내가 새긴 확신에 의심을 거듭하고 있다. 그게 연휴 내내 날 괴롭힌 것이었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도 어차피 머릿속은 이 생각뿐일걸 알았다. 뭘 해도 내내 이 생각뿐이고 현상유지만 하고 있는 상태가 답답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