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에 계신 할머니를 보러 갔다. 회사에 가는 날엔 아침에 눈뜨기 싫지만 오늘은 개운하게 일어났다. 엄마를 보고 싶은 마음에서 그렇기도 했다. 전화하니 엄마는 오고 있다고 했다. 씻고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출발하니 엄마와 거의 만나기로 한 곳에서 얼추 맞게 도착할 것 같았다.
오랜만의 중거리 운전은 좋았다. 운전을 좋아하는데 최근엔 회사만 왔다 갔다 하고 긴 거리는 운전하지 않았다. 계절성 우울증인가 요샌 별로 하고 싶은 게 없고 뭘 시작했다가도 금방 그만두고 만다. 오늘도 밴드 연습이 있는 날이었지만 처음에는 엄마를 만나고 와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가 그마저도 취소하고 말았다.
뭘 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금방 그만두게 된다. 가장 열심히 했던 과거는 수능이었다. 당시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부가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러자마자 뭔가 시간을 들여 공들여야 하는 건 하지 않게 됐다.
요양원에 도착하자 보호사는 할머니가 핸드폰을 옆에 꼭 두고 잤다며 기다렸다고 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를 보자 좋았다. 90을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 계신 게 감사해서다. 식사장소로 이동하는데 30분 정도 걸렸고 음식점입구가 펜스가 쳐져있어 옆가게로 갔다가 돌아와야 했다. 걷기 힘들어하는 할머니가 한 발짝 내딛는 것도 불안했고 날씨도 비가 왔다 눈이 왔다 했다. 차를 가져가서 옷을 얇게 입은 것이 너무 추웠고 할머니도 케어해야 했다.
하지만 무사히 가게에 도착해서 식사를 하고 할머니를 요양원에 데려다주고 오는데 엄마가 '할머니가 내가 아픈 손가락이래'라고 했다. 엄마의 엄마는 자식을 걱정하고 그건 대물림된다. 나는 그게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났다.
'엄만 언제가 가장 행복했어?'라고 물으니 '너네 낳고 3살 때쯤 씻겨서 유모차 끌고 나가고 그런 때가 가장 좋았어'라고 했다. 엄마가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을 때 아이를 키우며 행복을 느꼈다. 엄마가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가졌을 무수한 희망을 나로 치환한 것이다. 내가 뭐라고 엄마의 젊음을 빼앗았나. 그런 나는 엄마에게 어떤 슬픔을 주었나 생각하니 또 너무 슬펐다.
엄마,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우리 엄마. 엄마를 터미널에 데려다주며 나는 결국 무상함을 느꼈다.
할머니 귀가 안 들리고 엄마는 나이가 들고 나도 나이가 들어간다.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건 없고 나는 엄마에게 염색약을 쓰라고 사줄 뿐이다. 결국 내가 결혼을 한다 해도 또다시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반복일 수밖에 없는 건가, 그런 생각에 집에 와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주말마다 음악을 연습하는 것도 결국 무의미하게 여겨져 누워서 잤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에 한심하게 느끼다가도 그저 피드만 내릴 뿐이었다. 또 무심하게 내일은 오고 다가올 4월은 왜 그리 또 무정할 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