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금요일이어서 기분이 좋을 만도 했지만 출근하기 전부터 출근하면 해야 할 일들로 머리가 아팠다.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지만 기한이 정해져 있는 일이라서 담당자를 독촉하고 기안을 올렸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후다닥 마무리를 하고 나서 또 다음 일, 그게 처리되면 또 다음 일을 쳐내는 식이었다.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머리는 포화상태가 되어 급히 집으로 피신했다. 알리오올리오를 만들어 먹고 나니 좀 진정되어서 쉬다가 출근하니 보스가 또 독촉했다. 과업은 상위가 경과를 작성하라고 한 것이었는데, 본인이 작성하면 되는데 하위기관인 보스한테 시키고 보스는 또 내게 시키는 격이었다.
그냥, 그런 일을 마주하고 있으면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만 같다. 그냥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할 수 있는 일들, 그런 일에 내가 깎여져 나가는 기분을 느끼다가 참을 수 없어 네일숍을 예약하고 조퇴했다. 그러자 또 전화가 왔다. 내용을 수정하라는 것이었다. 퇴근한 직원에게 시킬 것 없이 내가 보스라면 본인이 썼을 것이다. 그는 내가 퇴근인사를 할 때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본인이 하기 싫으면 나도 하기 싫은 걸 알아야지.
샵에서 직원은 슥슥 네일을 갈아주었고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작성할 시간이 없어 결국 용역한테 부탁했지만 회신된 내용은 결국 내가 다시 작성해야 했다. 상위에게 오늘까지 해야 하는 거냐 물었더니 사무관이 오늘까지 해놓으라고 주무관에게 말했다고 한다. 금요일까지 보내라는 건 주말에 나와서 작업하겠다는 건가? 그래도 보고는 다음주가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젠 체 하지 않고 젠틀한 주무관이 시키는 말엔 군말 없이 응하지만 권위적이고 은근한 남성우월이 스며져 나오는 계장이 일 시키면 일부러 안 하고 싶어진다.
결국 샵을 나와 집에서 추가 작업을 해서 자료를 보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 분명 신체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영혼을 따르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힘겹게 삼겹살을 구워 먹고 나서 소파에서 무위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설거지와 빨래는 해야 하니 간신히 몸을 일으킨 다음에 나와 같은 처지의 직장인 유튜브를 보았다. 그도 번아웃인 것 같고 나도 그런 것 같아서 같은 처지라 위안을 받나 보다. 유튜버가 영상을 안 올리는 한 달 동안 괜히 마음이 쓰였다. 인생은 무엇일까. 생각에 꼬리를 물다가 잠을 청하고 다음날 아침이 찾아오는 것의 반복이다. 내게 주어진 의무는 하나같이 하고 싶지 않고 뇌를 비우고 살고 싶다. 집에 오면 뇌도 냉장고에 넣어 놓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