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오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일정이 딜레이 되는 걸 알면서도 돈을 늦게 주라고 하는 보스 때문에 오후는 일을 안 했다. 그 입장에선 회의에 나온 내용이 보완이 안되었다고 산출물을 다음 주에 확인하라고 하는 건데 이건 절차상이라서 업체가 돈을 준다고 일을 안 할 리도 없다. 탁상행정에 질린 나는 그러라면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해서 지연되는 일정은 그가 한 거니까 할 말 없을 테지. 그러면서 계획안을 미리 작성해 놓으란다. 작성할 리가 없지.
요샌 클래식 음악연주에 빠져있다. 동네에서 주 3번 한 달 7만 원 연습실을 끊었는데 이 때문에 주말에도 뭘 할지 고민 안 하고 연습실로 가면 된다. 피아노가 그렇게 좋은 건 아니지만 잘 눌리고 경쾌한 소리가 난다. 선호하는 피아노는 부드러운 조율이 되어있는 것이지만 한 시간에 만원씩 주면 살림이 거덜 난다.
퇴근해 음식을 할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서 버섯에 계란 입혀서 구워 먹은 걸로 식사를 끝냈다. 얼마 전 PMS에 과자를 먹었다고 피부에 바로 뾰루지가 나는 걸 보면 몸은 정말 정직하다. 천연 재료로 챙겨 먹으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요리는 여전히 귀찮다.
얼마 전 진료 보러 갔을 때 의사가 책상에 피로해소젤리랑 회복제를 병째 놓고 있던데 직장인 피곤은 다 같은가 보다. 그의 주식창에 흥구석유가 쓰여있어서 이 사람도 돈 벌려고 용쓰는구먼 했다. 아직도 진로 결정은 못했다. 하지만 회사에서도 피아노생각만 하는 걸 보면 기회가 온다면 날아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다.
칼럼을 좀 읽었는데, 대학 때 동기가 빚 받으러 온 것처럼 만나러 온 내용을 보고 '걔가 그랬던 거구나' 무릎을 쳤다. 그렇게 사람에게 속고서 그걸 사랑이라 믿고 싶어 했던 나라니. 그건 몇 번의 입맞춤과 스킨십에 몸을 취하고 싶어 했던 것이란 명징한 사실을 지금에서야 알았다. 사람을 못 믿으면서도 내 모든 걸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하는 것도 웃긴다. 봄은 항상 설렘보다는 열패감을 느끼게 한다. 시간이 지나도 봄은 기어이 와서 그저 시간이 가는 걸 확인시켜 줄 뿐이라고. 그리고 계속 반복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