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 천공의 성 에리체

Erice

by 장덕영

천공


드높이 열린 하늘공간. 천공의 성이라면 으레 아바타에 나오는 나비족의 거주지, 판도라 소행성들을 상상하게 된다. 이거저거 볼거리 많은 이탈리아까지 와 본 김에, 이곳 시칠리아 어느 구석에도 그런 데가 아직까정 존재한다기에 필자는 부리나케 가보려 한다.




Scene 1 트라파니


이탈리아에서 한때 소금을 금보다 비싼 사치품으로 인식, 귀한 손님이 오면 음식에 소금을 듬뿍 넣어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한민국의 신안 천일염처럼 지중해에서도 최고급 퀄러티 소금을 생산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트라파니가 거기다. 소금 Salt의 어원인 라틴어 Sal이 대충 이 동네에서부터 퍼졌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로마 시대 때, 병사들에게 소금 살 수 있는 돈 Salarium을 급료의 일부로 지급했는데 Salary는 여기서 유래하며, 병사들이 생야채에 소금만 곁들여 먹던 것에서 Sal 쳐서 먹는 야채 요리를 Salad라 부르기 시작했다나.

아주 오래전부터 쓰던 전통 방식의 소금 생산


시칠리아 > 팔레르모 인근 트라파니 > 에리체


팔레르모의 화려한 빛을 뒤로하고 인근 트라파니로 이동한다. 트라파니행 버스에 몸을 실으면 해안선 따라 한 시간 남짓 거리다. 트라파니 도심 어디서 하차, 에리체 올라가려면 케이블카를 타야 한다기 마을버스로 다시 갈아탄다. 정류장 표시도 없고 그냥 필자가 서 있는 곳에 버스가 와서 태워준다나. 아직도 세상은 진정 아날로그한 곳이 많다.


트라파니 바닷가와 시내


케이블카 정류장에 내렸으나 가는 날이 장날, 오늘은 쉰다고. 거참... 남산 꼭대기 팔각정까지 가야 하는데 셔틀도 없고...드뎌 그걸 해본다. 엄지척! 나이 좀 드신 양반이 간단히 동네 자랑 후, 태워줄 테니 따라오란다. 마침 꼭대기 아랫마을 거주민이었기에 망정이지...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히치하이킹에 협조해준 마을 이장 같은 양반



Scene 2 에리체


산꼭대기 마을. 안개 속을 걷는 혹은 구름 위를 걷는 듯, '천공의 성'이란 애칭이 이곳에 어울리는 용어임을 확인한다. 고풍스런 집, 돌길, 골목, 풍경이 어우러져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을 끝자락엔 언제나 솜사탕 구름과 파아란 하늘이 펼쳐져 신비로운 경관이 일년열두달 연출된다. 미야자키 하야오 '천공의 성 라퓨타'를 연상시키는 풍경이라 해도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신비로움을 안고 입구에 다다른다


성채 입구에 있는 성당


보라! 이런 마을이 아직 우리 사는 세상에 존재함을. 그저 도심에서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우리 몸은 중세시대 마을로 툭 떨어진다. 인기척 하나 없는 날이라 더욱 불가사의하다. 안개가 자주 낀다. 마을 사람들은 이 짙은 안개를 '비너스의 키스'라 부른다.


실제 거주하는 마을 풍경. 마을 전체 길바닥이 동일한 포장석이다.

62번지 주택. 마침 내 나이가 만62세라 기념으로 촬영한다


해리포터 속으로 들어가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살면서 이런 곳을 다닌 적 있는가. 에리체는 마을 전체가 이렇다. 우리나라였다면 벌써 재개발이 들어가도 몇 번은 했을 테다. 그나마 서울 북촌, 전주 한옥마을처럼 명맥 유지하는 데가 몇 있어 위안 삼는다. 하기사 단테가 지금 피렌체로 돌아와도 자기 집 찾을 수 있을 정도라니 말해 뭐하나. 유럽은 특히 이탈리아는 현대문명도 유지하지만 고대문화도 간직하는 정성이 남다르다.




Erice, son of Aphrodite


앞으로 봐도 이쁘고 뒤태도 이쁘다. 그래서 아프로디테. 그녀는 로마로 이사와서도 많은 아들내미를 생산하니, 이곳 토속 왕이었던 인간과 또 연을 맺어 아들 에리체를 낳는다. 효자였는지 산꼭대기에 어머니 비너스를 위해 신전을 세웠다는 썰이 있다. 이전 카르타고인들의 성벽 터 위에 노르만 지배 당시 그들이 가져온 건축양식을 더해, 성채 규모의 확장공사를 한 게 오늘에 이른다. 신전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마을 동쪽 절벽 위에 Castello di Venere 비너스의 성이라 하여 이름만 남은 곳이 바로 거기요 인증샷 명소다. 아드님께서 시칠리아 북서쪽 귀퉁이를 통치한 연유로 이 마을을 아직까정 에리체라 부른다.


좌측(비너스성 페폴리성) 우측은 에리체성 망루


고색창연


순간, 햇빛이 구름 사이로 쏟아지자 못 볼 줄 알았던 비너스성페폴리타워 (Torretta Pepoli 앞쪽 밝은색)가 드러난다. 아주 잠깐이었고, 이내 안개 속에 다시 묻히고 만다. 이런 풍광이 지상에 존재하는가의 의문이 계속 든다. 이때의 기억을 필자는 잊을 수 없다. 사실 우리가 보는 이 성채들은 1000년 전 노르만이 세운 것으로, 그 이전 신화 속 에리체가 세운 비너스의 궁이라고 좋게 봐주는 것뿐이다.




안개에 묻힌 성채라. '센과 치히로'가 툭 떨어진 곳이 이랬을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떨어진 곳이었을까. 에리체는 그냥 중세도시 느낌이 아니요, 거저 말로 이해시킬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지상의 모든 언어를 동원, 수식해 보려 해도 결코 에리체를 설명하기 불가하다. 아늑한 곳, 조용한 마을, 고요한 동네... 다 웃기는 말이다. 말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음을 선언하면서 차라리 동영상과 사진 몇 장으로 대체함이 더 현명하다 하리라.





세상의 소금과 빛


광야에서의 유혹을 물리치고 우선 먼저 어부 넷을 제자로 삼은 후 산상설교 할 때 등장하는 말이다. ’소금과 빛‘에서 한 글자 바꾸어 ‘소금과 밀’로 유명세 떨치던 곳이 있다.

고대 헬라 때부터 최고의 곡창지대는 흑해연안과 우크라이나 평야 그리고 시칠리아 세 곳이다. 전쟁은 땅을 빼앗으려 함보다 이런 곡창지대를 얻기 위함이 더 크다. 지금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이유가 바로 그거다. 시칠리아는 밀과 더불어 최고급 소금까지 생산되는 땅이라, 그러니 뭐 푸틴의 아바타들이 이 동네부터 흑해 일대를그냥 놔둘 리 없었다는 건 아주 적확한 표현이다.


여행가방 메고 다니며 머문 곳에서 인간의 탐욕이 빚은 이야기를 듣노라면 발걸음은 무거워진다. 에리체를 품은 트라파니를 떠나 본토로 들어가는 배 타러 동해안으로 이동하는 내내, 우크라이나 현실에 더욱 불편하다. 여행에서 배우는 역사라는 게 참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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