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모스(Falmouth)
오늘 이야기는 콘월에서 가장 활기가 넘치고, 젊은 사람들이 많은 동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짝꿍이 콘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우리가 콘월에 머무는 동안 꽤 여러 번 방문했던 곳이기도 하다. 바로 콘월의 젊은 동네, 팔모스(Falmouth)이다. 이 동네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 한 번으로 끝내기는 다소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 번에 나눠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오늘은 콘월을 방어하는 기지로서의 팔모스에 대한 이야기이다.
팔모스에 처음 가게 된 것은 짝꿍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고 간 날이었다. 콘월에 도착한 이후 이틀이 지났을까, 짝꿍이 팔모스에 가고 싶다고 했고 우리는 다음 날 바로 팔모스에 갔다. 포트리스에서 팔모스까지는 차로 약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고, 팔모스가 나름 콘월의 경제적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라서 팔모스까지 가는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콘월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콘월의 수도라고 불리는 도시는 트루로(Truro)이지만, 콘월에서 가장 활기찬 동네를 꼽으라면 바로 팔모스를 떠올리게 된다. 그 이유는 팔모스 바로 옆에 있는 펜린(Penryn)이라는 동네에 엑시터 대학교(University of Exeter)의 분교가 있기 때문이다. 펜린이 워낙 작은 동네이고, 팔모스까지 워낙 가까워서 이곳에 다니는 대학생들이 팔모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러한 이유로 팔모스 거리에는 콘월의 다른 동네에 비해 젊은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콘월에서 가장 젊은 동네가 된 것이다.
팔모스는 짝꿍에게 특별한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짝꿍이 영국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콘월에서 잠시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머물렀던 지역이 바로 팔모스 옆 펜린이었고, 자연스럽게 팔모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짝꿍에게는 팔모스에서의 추억이 많고, 자연스럽게 콘월의 다른 지역에 비해 팔모스에 조금 더 많은 애착과 심리적 친밀감이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이곳을 많이 찾았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쇼핑을 하고 싶다거나, 무언가를 사고 싶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이 바로 팔모스이기도 하다. 젊은 대학생들이 많은 곳이라서 아무래도 나와 짝꿍이 둘러볼 만한 가게가 많았고, 식당이나 카페, 펍도 많았다.
하지만 짝꿍 아버지가 우리는 처음으로 데리고 간 곳은 팔모스 시내가 아니었다. 팔모스 중심가를 지나치고 기차역도 지나치면 펜덴니스 라이즈(Pendennis Rise)라는 언덕길이 나오고, 언덕길 중턱에서 차가 멈췄다. 차가 멈춰선 이곳은 그냥 차가 다니는 도로에 있는 일반 주차구역이었는데, 이곳에서 팔모스 동네와 팔모스 앞바다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지도에 등록된 곳도 아니고, 인터넷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정보인데 이렇게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은 역시 현지인의 힘이었다. 현지인만 알 수 있는 장소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팔모스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았다.
팔모스 앞바다에는 배와 요트들이 정말 많았다. 그리고 재밌는 사실을 이 배와 요트들이 바다 중간에 둥실둥실 떠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줄로 묶여 있어서 떠내려가지는 않지만, 방파제나 항구에 정박해 있지는 않았다. 문득, 저 배 주인들은 본인들 배까지 어떻게 갈까 궁금해져서 짝꿍 아버지한테 물어보니까 방파제에서 배까지 옮겨주는 작은 보트가 있다고 한다. 그 보트를 타는데 돈을 내야하는지는 모르겠다. 짝꿍 아버지가 말해주길, 이렇게 바다 위에 배를 세워놓으려면 매달 돈을 내야 하는데, 그 비용이 꽤 비싸다고 한다. 그렇게 비싼 돈을 내면서까지 배를 정박해 두는데, 그 배까지 날라주는 보트에 돈을 또 내야할까라는 합리적인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서있는 바로 앞에는 배를 만들고 고치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이날은 못보고 나중에 봤는데, 이곳에 해군 함정이 정박해 있기도 한다. 어느 날은 이곳 근처에서 해군 함정을 정박해 놓고 공을 차면서 놀고 있는 해군의 모습을 본 적도 있다. 짝꿍 아버지에 따르면, 이곳은 많은 배가 수리를 위해 정박하는 곳으로 그 중에는 영국 배가 아닌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호주 또는 뉴질랜드 국기(두 나라의 국기가 꽤 비슷하고 바람에 흔들려서 구분이 어려웠다)를 흔들고 있는 함정이 정박해 있는 모습도 보았다. 이곳이 해상에서 영국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관문인 셈이다. 팔모스 또는 범위를 더 넓혀서 콘월의 이러한 역할은 오늘날에 새롭게 부여된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이어지던 것이다.
우리가 멈췄던 곳에서 차를 타고 조금만 더 들어가면 콘월의 이런 역할에 대해 알 수 있는 역사적 장소가 나온다. 팔모스에서 바다 쪽으로 살짝 튀어나와 있는 곳으로, 역사적으로 콘월을 방어하는 요새이기도 했던 펜덴니스 포인트(Pendennis Point)이다. 이곳은 팔모스 완전 끝에 있는 지점으로 접근성이 그렇게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펜덴니스 포인트에 도착해서 위쪽을 보면 언덕 꼭대기에 펜덴니스 성(Pendennis Castle)이 눈에 들어온다. 16세기 초에 지어진 성으로, 이후 16세기 후반 스페인 함대를 물리치는 등 영국 역사에서 꽤 많은 공헌을 한 성이면서 지금까지 가장 잘 남아있는 해안 요새이기도 하다. 주차장에 차가 꽤 많았던 것을 보면, 이런 역사적 의미를 찾아오는 관광객이 꽤 많은 듯 했다.
우리는 펜덴니스 성을 올라가보진 않았다. 대신 눈 앞에 보이는 바다를 향해서 내려갔다. 우리가 내려가는 길 끝에는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바다를 향해 내려가다 보면, 중간에 아주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건물 유적에 다다른다. 이 건물은 리틀 덴니스(Little Dennis)라는 이름의 유적으로 펜덴니스 성과 함께 건설되었고, 안에 대포를 넣고 다가오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건물로 내려가면서 이곳의 지형을 바라보니까 왜 이곳에 방어기지를 건설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우리가 서 있는 팔모스 지역과 반대편의 세인트 마위스(St. Mawes; 실제 영어 발음은 세인트 모스에 가깝다) 지역이 관문 역할을 하고 있었고, 이곳처럼 세인트 마위스 언덕 위에도 성이 늠름하게 자리하고 있다.
적이 침입했을 때 양쪽에서 공격하기 좋은 장소이고, 양 지역은 언덕으로 고도가 약간 있어서 적 입장에서는 공격하기 꽤나 까다로웠을 것이다. 짝꿍의 아버지도 이곳을 이야기할 때 반대편에 있는 세인트 마위스도 항상 같이 하나의 쌍으로 언급해야 한다고 설명해 주셨다. 팔모스에서 세인트 마위스까지 가는 배가 하루에도 여러번 운행한다. 두 지역은 배로 가면 20분 남짓 걸리는데, 차로 가면 1시간 이상 걸린다고 한다. 반대편에 있는 세인트 마위스도 한 번 다녀오고 싶었고, 짝꿍의 아버지도 기회가 되면 한 번 배타고 갔다오라고 추천해 주셨는데, 그 기회가 이번 여정에는 없었다. 다음 여정에는 그 기회를 만들어 봐야겠다.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에 집중해 보자. 이런 역사적인 가치를 차치하더라도, 팔모스의 펜덴니스 포인트는 풍경을 보기 위해서라도 충분히 와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콘월의 어디를 가더라도 아름다운 바다를 볼 수 있기는 하지만, 각 지역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눈부시게 푸르고 영롱하면서도 광활한 바다는 끊임없이 봐도 결코 질리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눈 앞에 끝없이 이어지는 바다와 수평선, 그리고 반대편에 있는 세인트 마위스와 그 언덕 위에 지어진 성도 눈에 들어온다. 팔모스에 비해 세인트 마위스는 정말 작은 동네로, 짝꿍 아버지에 따르면 펍도 몇 개 없고 다 둘러보는데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작다고 한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서 저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그 바람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 아쉬움이 발판이 되어 다음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에 조금의 아쉬움은 남아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한국의 남해바다와 정말 비슷해.
여수에 갔을 때 콘월을 떠올렸는데, 여기서는 한국을 떠올리네."
그리고 바다 바로 앞에 아직까지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리틀 덴니스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창문이 있다. 예전에는 이곳이 대포를 놓고 적을 공격하는 곳이었겠지만, 지금은 그 대포가 사라지고 아름다운 바다를 건물 안으로 불러들이는 문이 된다. 이 건물 안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유난히 더 파랗고 밝게 빛난다. 이는 다소 어둡고 침침한 건물 안에서 밝고 청량한 밖을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건물 양 옆으로는 구불거리는 해안선이 길게 이어진다. 포트리스에서 본 해안선은 절벽이었는데, 이곳의 해안선은 바위로 되어있긴 했지만 절벽은 아니었다. 짝꿍은 이곳의 해안선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여수나 제주와 같은 바닷가가 떠오른다고 했다. 실제로 해안선의 모습만 보면 많이 비슷하기도 하다.
얼마나 이곳에 서 있었을까. 이곳에서 찰랑이는 바다를 바라보고, 그 소리를 원없이 들었다. 바다가 바로 코앞이라 바다 내음과 소리를 정말 가까운 곳에서 맡고 들을 수 있었다. 콘월에 머무는 내내 바다를 정말 많이 봤지만, 이때만 해도 우리에게 어떤 여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우리는 이 순간을 최대한 즐겼다. 단 하루도 예측이 되지 않는 영국의 날씨 때문에 이렇게 맑고 파란 하늘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는 날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콘월에 한달이라는 꽤 긴 기간을 머물렀기 때문에, 일정이 빠듯하지 않아서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을 조금 더 길게 누릴 수 있었다.
실제로 이날도 팔모스 다음 여정이 없었고,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우리는 하루에 한 곳, 또는 두 곳만을 정해서 가보고, 그 장소에서 아무런 제약과 심리적 압박 없이 우리가 원하는 만큼 편안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 장소가 바로 이곳, 팔모스 펜덴니스 포인트였다. 조급하지 않기, 재촉하지 않기, 앞을 내다보지 않기, 뒤에 남긴 미련을 생각하지 않기. 그저 이 순간을 최대한 즐기고,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기. 이것에 이날 팔모스 펜덴니스 포인트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었다. 우리는 콘월에 머무는 한달 동안 이런 생각을 최대한 실천하려 노력했다. 그 덕분에 콘월에서 가본 모든 지역이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했기에, 모든 순간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다.
오늘의 이야기도 이렇게 끝이 났다. 팔모스는 콘월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는 동네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행자가 팔모스 중심부만 둘러보고 돌아가고, 이렇게 펜데니스 포인트까지 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듯, 오늘은 정말 생소한 장소를 소개했다. 앞서 소개한 칸 브레아와 마찬가지로 콘월을 여행하는 사람에게 이곳까지 가보라고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팔모스 중심부에서도 차를 타고 5분은 더 들어가야 하는 곳으로, 접근성이 그렇게 좋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에는 또 다른 장소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