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즈엔드(Land's End)
콘월에 우리가 머문 지 2주가 넘어가는 어느 날, 짝꿍이 영국의 땅끝마을인 랜즈엔드(Land's End)에 가자고 했다. 이곳은 5년 전 짝꿍의 가족을 처음으로 만나러 콘월에 왔을 때도 잠시 들렀던 곳이다. 우리에게는 다소 특별한 추억이 깃든 이곳에 다시 가게 된 것이다. 랜즈엔드에서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졌을까. 그 이야기를 이제 시작하려 한다.
□ 세넨 코브(Sennen Cove)에서 랜즈엔드(Land's End)까지
여름에 랜즈엔드는 항상 사람이 많다. 축제와 같은 분위기가 여름 내내 이어지는데, 그만큼 항상 사람으로 붐빈다는 뜻이다. 5년 전에 이곳을 처음 갔을 때에는 겨울이라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심지어 상점이나 식당들도 모두 영업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 그 당시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랜즈엔드 주차장에 차를 대기 어려울 수도 있고, 차를 댈 공간이 있더라도 주차비가 꽤나 비싸다. 5년 전 겨울에는 주차비를 낸 기억이 없어서 시골이라서 무료인거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겨울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굳이 주차비를 받지 않는 듯 했다. 하지만 여름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는 만큼 주차장이 유료화되고, 그 금액도 결코 저렴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안을 찾았다. 바로 세넨 코브라는 동네로, 랜즈엔드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일반적인 콘월의 바닷가 마을인 세넨 코브에는 두 개의 주차장이 있고, 주차 요금은 랜즈엔드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다만 문제는 이곳에서 랜즈엔드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것인데,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해안 절벽을 따라 산책로가 길게 이어져 있다. 그래서 바다를 보면서 걷다보면 어렵지 않게 랜즈엔드까지 도착할 수 있는데, 그 거리는 약 30~40분 정도이다. 처음 세넨 코브 바닷가에서 해안 절벽 위 산책로까지 올라가는 길만 제외하면 평지로 계속 이어진 길이라서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앞에 쓴 포스팅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산책로를 따라 계속해서 이어지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좋은 기분으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세넨 코브 마을에서 언덕길을 따라 해안 절벽 위로 올라가면 작은 마을과 그 뒤로 길게 펼쳐지는 세넨 해변(Sennen Beach)를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반대편으로는 굴곡진 해안 절벽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이 해안선이 우리가 걸어갈 길이자 랜즈엔드까지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이다. 언덕을 오른 후 잠시 멈춰서서 세넨 코브 마을과 아름다운 해안선을 바라본 우리는 랜즈엔드를 향해 본격적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는 계속해서 바다가 보이고 왼쪽으로는 넓은 평원이 펼쳐진 이곳의 풍경은 매 순간순간이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만큼이나 아름답게 담기지 않았다.
"저기 랜즈엔드 보인다! 얼마 안 걸은 것 같은데 벌써 도착했네."
멋진 풍경을 벗삼아 걷다 보니 우리의 목적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얼마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도착지에 다다른 것이다. 그만큼 콘월의 해안가 트레킹 코스는 걷는 재미가 분명히 있다. 지도 상으로 한시간이 걸리는 거리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걷다보면 그렇게 힘들거나 오래 걸린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자연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려고 멈춰서는 순간이 많기 때문일까. 저 멀리 랜즈엔드의 마을이 보이고, 검은색 배경에 하얀색 십자가 모양의 콘월 깃발은 바람에 사정없이 휘날리고 있었다. 콘월 사람들은 이 깃발에 상당한 자부심과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 유니언 잭이라고 불리는 영국 국기보다 콘월 깃발에 더 많은 애착을 보이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그만큼 콘월 사람들의 코니시(Cornish) 정체성은 정말 강한 편이다.
조금 더 걸어서 콘월 깃발이 휘날리는 곳까지 도착했다. 바다가 코앞에 있기 때문에 바람이 정말 세차게 불었다. 우리는 바람을 뚫고 바다 바로 앞에 멈춰섰다. 바다 건너편에는 작은 암초 바위들이 여러 개 있었고, 그 위에는 그곳에 암초가 있음을 알려주는 등대가 세워져 있었다. 낮에는 아무 일도 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건축물이 밤에는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무도 보지 않을 야심한 시간에 오로지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을 위해 묵묵하게 불빛을 비쳐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불빛 덕분에 배는 사고를 피하고 길을 찾는다. 등대를 볼 때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우리 사회가 사고를 내지 않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데 그들의 역할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본인이 빛나거나 드러나지는 않지만 주위를 밝혀주는 그 사람들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콘월 사람들은 콘월 깃발을 참 좋아해."
이곳에는 세차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오롯이 맞서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콘월의 깃발인데, 이 깃발은 불어오는 바람에 쉴 새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곳에 영국 국기는 게양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팔모스(Falmouth)나 다른 곳에서는 콘월 깃발과 영국의 국기가 나란히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곳은 콘월 깃발 뿐이었다. 영국의 땅끝이라는 상징성을 감안할 때 영국의 국기가 충분히 걸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지만 왜 콘월 깃발만 있는 것일까. 그 숨은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콘월 사람들의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콘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 콘월 깃발을 정말 많이 보게 된다. 본인의 차 뒤에 콘월 깃발 모양의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차들도 많고, 콘월 깃발을 걸어놓은 집들도 많이 봤다. 문득 콘월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짝꿍 아버지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여기는 콘월이야. 여름만 되면 북쪽에서 외국인이 참 많이 와."
여기서 북쪽은 콘월 위에 있는 지방을 뜻하고, 외국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영국인을 의미한다.
콘월 깃발에서 약 5분 정도만 더 걸어가면 랜즈엔드 마을이 나온다. 우리는 마을로 들어서기 전에 랜즈엔드를 상징하는 기념탑으로 먼저 향했다. 이 기념탑은 이곳이 영국 땅의 끝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옆에서 사진을 함께 찍는다. 우리는 5년 전에 사진을 찍었는데, 여름이 되니까 그 때와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이 기념탑과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달랑 사진만 찍기 위해 돈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기념탑의 가장 아래 화살표에 본인의 도시를 말해주면 그곳에 도시 이름과 거리, 날짜를 넣고 사진을 찍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은 인화해 준다고 한다. 이렇게 개인적인 기념사진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어릴 때 여기서 사진 찍은 적 있어. 집에 사진도 있을걸?"
이 개인 기념사진 서비스는 꽤 오래 된 듯하다. 짝꿍이 어릴 때 이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고 하는 걸 보면, 적어도 십 년 이상은 이 자리에서 관광객들에게 기념사진을 만들어준 것이다. 우리가 5년 전에 그냥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가 겨울이었고 방문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영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랜즈엔드 마을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은 상태였으니, 이 사진 서비스가 운영됐을 리가 없다. 그래도 5년 전에 그냥 찍을 수 있었던 사진을 돈 내고 찍어야 한다는 사실에 약간의 거부감이 들긴 했다. 물론 개인적인 정보가 더해진, 지극히 개인적인 기념사진이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돈을 내지 않고 사진을 찍었던 경험 때문인지 우리의 권리가 사라진 듯한 기분이 살짝 들었던 것이다.
"겨울과는 완전 딴판이네. 지금은 너무 활기 넘치고 좋은데?"
우리는 랜즈엔드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의 모습은 5년 전과 전혀 달랐다. 사람 한 명 볼 수 없었고 모든 건물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던 5년 전과는 다르게 랜즈엔드 마을은 사람으로 북적였고 활기가 온 마을을 휘감고 있었다. 버스킹을 하는 사람이 있고, 한 쪽에는 무대도 있어서 그 위에는 밴드가 쉴 새 없이 음악을 들려주고 있었다. 카페테리아에서는 피쉬앤칩스, 버거와 같은 간단한 음식을 팔고 있었고 콘월과 관련된 기념품을 살 수 있는 가게 안에는 사람들이 통로를 메우고 있었다. 같은 마을인데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일까. 랜즈엔드의 전혀 다른 양면적인 모습에 다소 놀랐다. 사실 콘월이라는 지역을 겨울에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곳은 여름에만 잠시 반짝이는 동네라는 사실을 새삼 다시 한 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던 우리는 테이크아웃 카페테리아에서 핫도그와 햄버거를 주문했고, 작은 광장 위에 있는 여러 벤치 중에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밴드가 들려주는 음악을 들으면서 간단하게 허기를 달랬다. 음식을 먹으면서 하게 된 짝꿍과 나의 생각은 비슷했다. '다음에는 아무리 배고파도 이곳에서 음식을 사먹지는 않을 거야.' 관광지에 있는 테이크아웃 전용 카페테리아에서 파는 음식에서 맛을 기대한 우리의 잘못이었을까. 그래도 우리는 허기를 달랜 것으로 만족했다. 우리 옆에는 콩코물이라도 떨어질까 기대하는 갈매기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얻어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벌써 5년이 지났어. 시간 참 빠르다."
세넨 코브에서 랜즈엔드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중간중간 사진을 찍기도 하고 주변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자주 멈춰섰고, 그 결과 지도상으로는 30분 거리인 랜즈엔드까지 한시간 넘게 걸렸다. 한시간 넘게 끊임없이 움직인 우리는 랜즈엔드 광장 벤치에서 꽤 오랫동안 휴식을 취했다. 우리 손에는 음식이 있었고,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배경음악을 넣어줬기 때문에 앉아서 쉬는 동안 지루하지 않게 충분한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5년 전과 오늘을 서로 비교하면서 나와 짝꿍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 사이에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짝꿍이 영국에서 한국으로 넘어오고, 연인이었던 우리가 부부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긴장 가득했던 짝꿍 가족과의 첫만남이 5년 전이었는데, 5년이 지난 지금에는 그 긴장이 사라지고 나도 그들 가족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그 때를 추억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는 세넨 코브로 돌아갈 시간이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짝꿍이 랜즈엔드에서 불꽃놀이를 한다는 정보를 찾아서 그 시간까지 기다릴까 고민도 했지만, 그러기에는 2시간 넘게 더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불꽃놀이 끝나고 세넨 코브까지 깜깜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더욱 불꽃놀이를 보고 싶다는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결국 우리는 불꽃놀이를 포기하고 집으로 조금 일찍 돌아가기로 했다. 우리는 걸어온 길을 그대로 거슬러 가서 다시 세넨 코브에 도착했다. 날씨가 다소 흐렸고, 바람도 세차게 불고 있었는데 세넨 코브에 도착하니까 파도가 거세게 치고 있었다. 콘월에 머무는 동안 오랜만에 흐린 날씨를 경험했다. 사실 영국은 이렇게 흐린 날씨가 대부분인데, 우리가 머물렀던 8월이 날씨가 '비정상적'으로 좋았던 것이다. 짝꿍도, 짝꿍의 가족도 '이상하게도' 좋은 날씨가 계속 이어진다고 했다. 그러다가 이렇게 흐린 날씨가 찾아온 것이다.
"이게 영국의 날씨지. 지금까지 너무 비현실적으로 날씨가 좋았어."
이렇게 랜즈엔드로의 여정이 끝이 났다. 5년 만에 다시 찾아간 랜즈엔드에서 우리는 추억을 이야기했고, 그 위에 새로운 추억 레이어를 하나 더 쌓았다. 다음에 다시 이곳에 찾아오는 날에는 우리가 이야기할 추억이 두 개가 된 것이다. 그 추억 레이어가 켜켜이 쌓일 때까지 이곳을 많이 찾아오고 싶다. 콘월에 올 때마다 영국의 땅끝마을인 랜즈엔드는 찾아오지 않을까. 그 때는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질까. 그 순간을 소망하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