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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월 여행] 불빛이 반짝이는 마을

세인트 아이브스 야경

by 방랑곰


"우리 세인트 아이브스 다시 갈 일이 생겼어. 뮤지컬 보러 가자!"


어느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짝꿍이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더니 콘월에서 하는 뮤지컬을 하나 찾아냈다. 공연 보는 것을 좋아하는 짝꿍과 내가 이 기회를 놓칠리가 없었다. 우리는 그날 바로 표를 예약했고, 이렇게 다시 세인트 아이브스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뮤지컬이 저녁에 시작하기 때문에, 끝나고 나오면 이 마을의 야경도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며칠을 보내고 뮤지컬을 보러 가는 날이 되었다.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세인트 아이브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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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다시 봐도 아름답네. 마을이 참 예뻐."


지난 번에는 기차를 타고 세인트 아이브스(St.Ives)에 갔는데, 이번에는 직접 운전해서 갔다. 오후 느즈막한 시간에 가는 거라서 주차에 대한 걱정이 덜했고, 무엇보다 뮤지컬 끝나고 깜깜한 밤에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인트 아이브스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정도였다. 오후 늦은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해는 우리 위에 쨍하게 떠 있었다. 영국은 위도가 높아서 낮이 가장 긴 하지 무렵에는 해가 밤 9시는 넘어야 지고 11시 정도에 어두워진다. 콘월은 그나마 남쪽이라 일몰 시간이 조금을 빠르고, 이 때가 8월이라 해가 그렇게까지 길게 머물지는 않았다. 아마 밤 8~9시 사이에 해가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뮤지컬 시간이 오후 7시였고, 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왔기 때문에 남는 시간 동안 세인트 아이브스를 잠시 돌아다니기로 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마을로 향하는 길에 세인트 아이브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장소에 멈춰섰다. 이 마을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여전히 매혹적이었다. 더군다가 햇빛이 부드러워지는 오후 느즈막한 시간이라 바다와 마을의 분위기가 한결 따뜻했다. 불과 며칠 전에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고 돌아간 곳이었지만, 우리는 또 다시 세인트 아이브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조금 더 빨리 올 걸 그랬나? 한두시간만 머물기엔 아쉽네..."


이미 왔던 곳이고, 마을도 크지 않아서 한 두시간 정도면 마을을 다시 한 번 둘러보는 데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눈으로 보니까 더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천천히 바다를 따라 마을 중심부를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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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바다와 마을 중심부에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아마 이곳에 머무는 관광객일 것이다. 외부에서 당일 여행을 온 사람들이나, 이 마을에 살고 있는 거주민들은 오후 늦은 시간이 되면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다. 마을에 있는 대부분의 상점은 이미 문을 닫은 뒤였고(영국 시골 마을은 오후 5-6시면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는다), 바닷가에 있는 음식점과 펍만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냥 이리저리 거닐 목적이었기 때문에, 실내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그 앞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맥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영국 사람들에게 언제나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인 갈매기들이 따라 다녔다.


바닷가를 거니는 와중에 한 꼬마아이가 엄마와 갈매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꼬마아이는 갈매기가 너무 귀엽게 생겼다고 웃으면서 말하는데, 그 옆에서 엄마가 무심하게 한 마디 던졌다.


"They are the bane of our life!"


이 말은 '그들은 우리의 골칫거리야!'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이 표현은 영국 사람들이 정말 싫어하는 것을 대상으로 많이 쓴다. 이 표현을 들은 짝꿍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표현이 주는 의미와 그 엄마가 말하는 뉘앙스에서 그들이 갈매기를 얼마나 안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고, 짝꿍도 그 감정을 너무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갈매기는 영국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이자, 더 나아가 거슬리는 존재이다. 그도 그럴것이 갈매기들은 사람들이 먹고 있는 것이 빼앗아 가고, 심지어 사람을 공격하기도 한다. 먹을 것을 취한 갈매기가 나타나면 음식을 서로 쟁취하기 위해 서로 목소리를 높여 언쟁을 벌인다. 또 크기는 우리나라 갈매기의 두 배만해서, 날갯짓만으로도 위압감이 든다. 예전에 남이섬에서 과자나 음식을 빼앗아 가던 타조와 비교가 가능하려나. (그 타조가 아직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존재가 사방에서 날아다닌다고 생각하면 사실 편하지만은 않다. 나도 영국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경계했던 동물이 갈매기가 되었으니(특히 브라이튼에서), 영국의 갈매기는 외부인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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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월에서 뮤지컬을 보게 될 줄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인데?"

"오리지날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괜찮았어!"

우리가 이날 본 뮤지컬은 마틸다(Matilda)이다. 물론 마틸다 원래 배우들이 하는 공연은 아니었고, 콘월 지역의 학생들과 배우들이 하는 공연이었다. 그래서 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공연 제목도 '마틸다 주니어'이다. 당연히 공연의 퀄리티는 본 공연을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지역에 있는 사람들로 꾸며낸 공연임을 감안하면 꽤 잘 만든 뮤지컬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가장 동떨어진 콘월이라는 지역에서 현지 아이들이 뮤지컬이라는 무대를 직접 꾸미는 기회를 가지고 주민들은 이런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취지라고 생각했다. 약 2시간 정도 이어지는 뮤지컬을 보면서 아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았고, 신나서 공연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공연의 질을 떠나, 그 모습만으로도 세인트 아이브스까지 와서 소정의 비용을 내고 공연을 본 보람이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니까 밖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이 때가 9시 즈음이었는데도 완전히 깜깜해지지 않았고, 하늘도 파란 색깔을 여전히 보여주고는 있었다. 상점과 가정집, 그리고 가로등의 불빛이 길거리를 덮었고 노란 불빛 가득한 마을은 낮보다 훨씬 더 포근해졌다. 한결 한가해진 거리에는 여전히 일부 사람들과 차들이 다니고 있었다. 펍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 안에서 대화 소리와 웃음소리 등 여러 활기 넘치는 소리가 문 밖으로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도 그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운전해야 해서 맥주를 마실 수 없었기 때문에 보고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포근하고 따뜻한 불빛 가득한 길을 따라서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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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저기 올라갔다 가자. 저기서 바라보는 바다가 참 예쁠 것 같아. 지금 하늘도 너무 예쁘고."


우리가 주차한 곳은 세인트 아이브스 기차역이었다. 마을 중심에서 이 기차역을 가기 위해서는 작은 언덕을 넘어가야 한다. 언덕 꼭대기에서 내리막길로 내려가면 주차장인데, 그 옆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마을과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일종의 전망대가 있었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해가 넘어가면서 살짝 쌀쌀해지는 날씨 탓에 얼른 차를 타고 집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과, 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마을의 야경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전망대를 올라가 보기로 했다.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는 세인트 아이브스, 더군다나 밤에 세인트 아이브스를 다시 찾아오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전망대에 올라서자 세인트 아이브스의 항구마을과 바다, 그리고 핑크색으로 물든 하늘의 모습이 들어왔다. 마을에는 불빛이 켜져 있어서 낮에 보는 것과 느낌이 달랐다. 따뜻한 느낌 가득한 노란 불빛, 줄 하나에 매달려 바다에 둥둥 떠 있는 많은 배들, 잔잔하게 너울대는 바다의 모습이 전형적인 시골의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완벽하게 그려낸 한 폭의 그림 작품 같았다. 그리고 이 때가 완전히 어두워지기 직전, 즉 하늘에는 파란색과 함께 여러 색이 공존하는 순간이라서 더욱 그림이 아름다웠다.


"콘월 와서 야경은 처음 보네. 도시 야경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너무 아늑하고 아름다워!"


콘월에는 야경을 볼 만한 장소나 야경으로 유명한 장소가 거의 없다. 워낙 시골이라서 밤에는 사람들이 거의 돌아다니지 않고 상점도 문을 닫기 때문에 야경을 빛나게 해줄 불빛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바다로 유명한 콘월인데 밤에는 그 아름다움이 어둠에 묻혀버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와 짝꿍도 콘월에서 한 달을 머무는 동안 야경을 바라본 것이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만큼 귀한 순간이었고 그 때 눈에 들어온 모습이 너무 편안하고 아름다워서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한참을 전망대 위에 서서 콘월 마을을 둘러보았다. 항구마을에서 뒤를 돌면 세인트 아이브스 기차역이 보이고, 그 뒤로는 고급 맨션들이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그 아래는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파도만 덩그라니 남아버린 해변이 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돌리면 드넓은 바다가 보이고, 그곳을 지나면 다시 세인트 아이브스 항구 마을로 돌아온다. 그리고 마을의 아름다움에 또다시 사로잡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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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야경을 실컷 바라보다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차를 타고 포트리스(Portreath)로 돌아가는 동안 뮤지컬에 대해서, 그리고 세인트 아이브스의 야경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이날 우리는 콘월에서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을 두 가지나 했던 것이다. 그만큼 둘 다 할 이야기가 많았고, 콘월에서 아주 특별했던 하루였다. 물론 나는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운전해야 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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