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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월 여행] 콘월 번성의 흔적

세인트 아그네스(St. Agnes)

by 방랑곰

이제는 콘월에서 머물렀던 한 달이라는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우리는 콘월을 여기저기 배회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만, 곧 가족과 이별해야 하는 짝꿍은 가까운 곳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조금 더 갖고 싶어했다. 그래서 우리는 포트리스(Portreath) 주변을 다시 탐색했고, 우리가 아직 가보지 않았던 세인트 아그네스(St.Agnes)라는 장소를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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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월 거인이 살던 언덕


세인트 아그네스는 포트리스 근처에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자, 콘월의 전설을 품고 있는 장소이다. 이 전설은 콘월 여행 초반에 찾아갔었던 칸브리어(Carn Brea)와도 관련이 있고, 해당 포스팅에서 설명하기도 했다. 아주 오랜 옛날, 칸브리어와 세인트 아그네스에는 거인이 살고 있었는데 둘이 돌을 던지면서 놀았다고 하는 전설이다. 칸브리어에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인트 아그네스도 조만간 가야지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생각은 콘월을 떠나기 직전에서야 실현되었다. 세인트 아그네스는 콘월에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의 이름인데, 마을 주변으로 거대한 초원과 해안절벽, 그리고 해변까지 포함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세인트 아그네스에서 단순히 마을만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자연 공간을 함께 보고 돌아왔다.


"와!! 가슴이 뻥 뚫리네! 진짜 시원하고 좋다!"


우리가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세인트 아그네스 전망대였다. 이곳은 전망대라는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개인적으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이곳은 세이트 아그네스 봉화대(St. Agnes Beacon)이 있는 곳으로, 이 위에 오르면 주변 모습이 우리 눈 앞에 아무런 장애물 없이 펼쳐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은 충분히 전망대라는 이름으로 불릴만한 가치가 있다. 주차장에서 봉화대가 있는 정상까지는 걸어서 약 5~10분 정도 걸리는 아주 짧은 코스로, 오르막도 비교적 완만해서 힘들이지 않고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올라가는 거리가 짧다고 해서 그곳에서 보는 풍경이 덜 멋진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올라오는데 들인 노력에 비해 너무 과분한 풍경을 선사해 주는 곳이 바로 이곳, 세인트 아그네스 전망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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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보여? 저기가 뉴키야. 관광객 때문에 변한 곳이지."


이곳 전망대에서는 콘월 내륙 지역의 평야나 초원 지대 뿐만 아니라, 콘월 서쪽에 길게 이어지는 해안선을 조망할 수 있다. 우리가 이곳에 갔던 날은 날씨가 워낙 좋아서 가시거리가 꽤 길었는데, 덕분에 우리는 이곳에서 꽤 멀리 떨어진 뉴키(Newquay)까지도 볼 수 있었다. 뉴키에 대해서는 콘월을 여행하기 전부터 짝꿍에게 많이 들었던 지역이다. 뉴키는 콘월을 대표하는 관광지역 중 하나로,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가는데 이는 이곳에 공항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키는 콘월을 여행하고 싶지만 차가 없거나,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접근성이 좋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관광객이 많이 몰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번 콘월 여행에서 뉴키를 가지 않았다. 짝꿍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뉴키는 관광이 과도하게 발전하게 오히려 뉴키 본연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곳이라고 했다. 그저 사람 많고, 시끄럽고, 북적거리기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콘월을 대표하는 관광지역이기 때문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콘월에 가볼 곳이 워낙 많아서 뉴키는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렸고 결국 이곳은 가보지 못하고 콘월을 떠나게 되었다. 다음에 콘월을 다시 가게 된다면 반나절만이라도 뉴키를 가볼 계획이다. 관광이 지역의 본질을 바꿔버린 곳이라지만, 그 모습마저도 내 눈으로 직접 보고싶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거리가 아주 멀긴 했지만, 그래도 세인트 아그네스 전망대에서 뉴키를 눈에 담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저곳을 직접 가봐야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전망대를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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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월 번성의 기억


전망대를 내려와서 우리는 짝꿍이 콘월 관광 홍보자료에 있는 한 사진의 배경이 된 장소를 찾아 나섰다. 그 사진은 굴뚝이 있는 건물 하나가 바다를 배경으로 서있는 모습인데, 세인트 아그네스 주변 지도를 보다가 그 사진과 비슷한 장소를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거리도 전망대에서 그렇게 멀지 않았다. 차로 불과 1~2분 거리였는데, 걸어갈까 하다가 주변에 주차장이 있어서 그냥 차를 타고 잠깐 이동했다. 주차장에서부터 우리는 해안 절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 10분 정도 걸었을까, 버려진 건물 한 무더기가 나타났다.


이 버려진 건물들은 과거 콘월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흔적이다. 바로 광산으로 활용되었던 건물들인데, 과거에 콘월은 광산으로 크게 번영했던 역사가 있다. 콘월 광산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번성을 이룩했던 시기는 19세기이다. 이 시기 콘월에서는 구리와 주석을 중심으로 광업이 크게 발전했고, 이와 더불어서 콘월도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 콘월 인구의 약 25%가 광업에 종사했을 만큼 광업은 콘월 경제를 든든하게 뒷받침했던 산업이었다. 하지만 20세기 들면서 콘월의 광업은 쇠퇴기를 맞이했고 광산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콘월을 떠났다.


그렇게 콘월의 전성기가 막을 내렸고, 지금과 같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골 지역이 되었다. 콘월의 지금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콘월의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는 않는다. 이곳 말고도 콘월에는 과거 광산이었던 곳이 꽤 많다. 실제로 콘월을 여행하다 보면, 과거 광산으로 사용되었다가 이제는 버려진 건물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그중 일부는 관광 상품이 되어서 일종의 박물관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이곳처럼 건물들만 달랑 남아있다.


IMG_0046.JPG 짝꿍이 콘월 홍보자료에서 봤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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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건물만 덩그라니 남아있네. 언제 무너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겠어."

"그러게. 홍보도 많이 해주고 관리도 잘 해주면 좋을텐데... 아쉽다."


우리는 광산으로 사용되다가, 이제는 유적지가 되어버린 건물들로 다가섰다. 그곳에는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건물 유적들만 있었다. 딱히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이곳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짝꿍 아버지가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면 나와 짝꿍은 이 건물들이 어떤 용도인지도 잘 몰랐을 것이다.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이곳을 구경하고 돌아온 후에 인터넷을 찾아봤는데,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2006년에 지정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콘월과 서부 데본지역의 광산지역이 통합적으로 등재되었다). 그렇다면 이곳을 잘 가꾸고 다듬어서 홍보를 적극적으로 한다면 콘월의 관광산업을 조금 더 다양화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가 갔었던 세인트 아그네스의 광산지역은 아름다운 바다를 함께 바라볼 수 있고, 그 아래에는 넓은 해변도 있어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을만한 너무도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건물들을 하나하나 구경하는 동안 짝꿍 아버지께서 이곳에서 어떻게 광물을 캤고 사람들이 어떻게 일했는지를 짝꿍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영어로 된 설명인데다가 내용 자체가 쉽지도 않아서 나는 조금 듣다가 어느 순간 흐름을 놓치고 말았다. 아직도 영어 공부가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 순간이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설명을 듣는 대신 건물을 하나하나 자세히 훑어보면서 당시 사람들이 일했을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바다 쪽을 바라보는데 언덕 아래에 굴뚝이 있는 건물 한 채가 덩그라니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건물을 본 짝꿍이 소리쳤다.


"저기 있네! 저게 내가 사진으로 본 거야!"


그리고 우리는 건물을 자세히 보기 위해 언덕을 내려갔다. 높다란 굴뚝이 있는 이 건물은 다른 건물들에 비해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했고 그나마 건물의 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었다. 마치 과거 콘월이 번성했음을 알려주듯이, 이 건물은 바다를 바로 옆에 두고 높고 웅장하게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내부를 들여다봤는데, 내부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옆을 바라봤다. 웅장한 이 건물 옆에서 쉴새없이 파도소리를 내고 있는 바다가 정말 아름다웠다. 기다란 해변이 있고, 해안 절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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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세인트 아그네스 마을도 한번 보고 가자."


광산 유적을 다 보고 차로 돌아온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차를 타고 난 후에 짝꿍 아버지는 세인트 아그네스 마을도 한번 보고 가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이를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마을마다 조금씩 다른 특징이 있는 만큼, 당연히 이 마을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5분 정도 가니까 바로 마을이 나왔다. 마을 중심에는 1차선 도로가 일방통행으로 이어지고, 양 옆에는 영국 특유의 벽돌 주택이 늘어서 있다. 중간중간 상점이나 식당도 있고, 갈림길에는 어김없이 펍이 있었다. 그 펍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우리도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를 댈만한 곳을 찾지 못했고, 그대로 지나쳐 갈 수밖에 없었다.


펍을 지나친 우리는 바다 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 길의 끝에는 당연히 바다가 나왔는데, 그곳에는 절벽으로 둘러쌓인 작은 해변도 있었다. 해가 수평선을 지나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해변 위에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햇빛이 조금씩 사라지고, 바닷바람도 많이 불어서 날씨가 꽤나 쌀랑했는데도 해변 위에는 바다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다. 해변을 잠시 바라본 후에 우리는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 눈여겨 봐두었던 펍 안으로 들어섰다. 언덕길을 내려오기 전에 본 펍에 비하면 규모도 작고 사람도 매우 적었는데, 그냥 자석에 끌리듯이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작은 이 펍이 오히려 시골 마을의 전형적인 펍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너무나도 영국스럽고, 시골스러운 펍에서 우리는 맥주 한잔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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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국에서 너무 잘 지내고 있어. 걱정 안해도 돼."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우리 대화는 나와 짝꿍이 한국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짝꿍 아버지는 당신의 딸이 객지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걱정하면서도 자랑스럽게 여기셨고, 짝꿍은 그런 아버지에게 한국에 대한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다. 그렇게 작지만 아늑한 영국 시골마을의 펍에서 우리만의 소소한 이야기를 담아낸 그 순간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영국의 평범한 한 장소에서 평범한 대화가 오갔던 일상적인 순간이었지만, 그 장소에서 대화를 나누는 우리의 모습이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평범한 우리의 일상도 가장 특별한 순간이 될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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