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싱턴 정원(Kinsington Gardens)
포토벨로 마켓을 비교적 짧게 둘러본 후에 우리가 향한 곳은 런던 중심에 있는 켄싱턴 정원이다. 포토벨로 마켓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노팅힐 게이트역에서 그렇게 멀지 않아서 걸어서 갈 수도 있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도 된다. 이곳은 원래 계획에는 없었는데 짝꿍이 지금까지 가본 적이 없다고 해서 갑작스럽게 결정된 장소이다. 갑작스런 결정이긴 했지만, 마침 우리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오래 고민하지 않고 바로 이곳으로 향했다.
"이름은 정원(Garden)인데, 규모는 정원이 아니네. 여기 진짜 크다."
사실 켄싱턴 정원은 많은 사람들이 하이드 공원(Hyde Park)로 알고 있는 곳이다. 지도를 보면 런던 중심부에 직사각형 모양의 커다란 녹지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의 오른쪽이 하이드 공원이고 왼쪽이 켄싱턴 정원이다. 다만 하이드 공원이 버킹엄 궁전, 빅벤과 같은 런던 중심부와 가깝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다보니 켄싱턴 정원에 비해 조금 더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공간 전체를 하이드 공원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켄싱턴 정원이란 이름은 하이드 공원에 묻혀버린 것이다. 짝꿍도 이 공원 전체가 하이드 공원인 줄 알고 있다가, 이 사실을 알고 난 후에 비로소 켄싱턴 정원을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도심 속 건물을 헤치고 잔디밭과 나무들이 가득한 켄싱턴 정원으로 들어섰다. 사실 켄싱턴 정원도 하이드 공원에 못지않게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평화로운 녹색 공간이다. 이름은 '정원'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Garden'인데, 실제 공간은 전혀 정원의 규모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공원이 '정원'이란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곳이 역사적으로 실제 정원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공원 안에 있는 켄싱턴 궁전의 정원으로 조성된 것이다. 켄싱턴 궁전은 영국 왕실이 머무는 장소로 사용되는데, 현재 영국의 국왕인 찰스 3세의 부인이었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즉, 켄싱턴 정원은 영국 왕실 궁전에 딸린 실제 정원인 셈이다.
우리는 켄싱턴 정원의 왼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으로 들어가면 켄싱턴 궁전이 바로 나오고, 그 뒤로 거대한 공원이 이어진다. 켄싱턴 궁전은 내부도 들어갈 수 있지만, 우리가 갔을 때는 입장이 허용되지 않았다. 궁전 입장료는 25.4 파운드(약 42,000원)으로 왕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볼 수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입장료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영국 왕실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들어가 볼만할 것이다. 우리는 궁전을 외부에서만 보고 그대로 지나쳐서 공원 깊숙하게 들어갔다. 이곳에서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큰 연못이 나오는데, 나는 이 공간이 켄싱턴 정원에서 가장 좋았다. 넓게 탁 트인 공간에 잔잔한 연못과 그 위에 여유롭게 노니는 여러 새들을 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마음의 여유가 찾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켄싱턴 정원은 하이드 공원에 비해 찾아오는 사람이 적어서 분위기가 더욱 조용하고 아늑했다.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워낙 넓은 공간에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뿌려져 있어서 그렇게 많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잔디밭 위에서 쉬고 있는 새들의 숫자가 공원에 있는 사람들의 수보다 더 많아 보였다. 나무 아래 앉아서 쉬는 사람들과 그 앞을 어슬렁거리는 오리들이 한 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우리에게는 색다른 풍경이지만, 사실 영국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영국의 공원에 가면 오리가 백조와 같은 새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는데, 그들은 사람을 딱히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도 새들을 딱히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 근처에서 유유자적 노니는 새들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하루는 버밍엄에서 짝꿍과 공원에 간 적이 있었다. 공원에서 산책도 하고 앉아서 쉴 겸 간단한 간식거리를 들고 갔었다. 우리는 공원에 도착해서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가 갖고 간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그때는 서로 이야기하느라 주위를 둘러보지 못했는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둘러보니까 새들이 우리 뒤에서 가지런히 기다리고 있었다. 빵을 보고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빵 일부를 흘렸는데, 그 모습을 보고 멀리에 있는 새들까지 우리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정말 공원에 있는 모든 새들이 달려오는 것 같았는데,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면서도 두렵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본 우리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도망가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아서 우리는 벤치에 머물렀는데, 한동안 새들에 둘러싸여 있어야 했다. 나와 짝꿍은 그날의 모습을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가끔씩 꺼내어 보는 추억이다.
우리는 공원을 가로지르는 넓은 길을 따라 걸었다. 공원의 규모만큼이나 공원 안에 만들어진 길도 정말 넓었다. 하지만 그 넓은 길 위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우리는 그 길을 이리저리 오가면서 열심히 공원을 누볐다. 잔디밭 안으로 들어가보기도 하고, 벤치에 잠시 앉아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리고 길 옆에 카페가 있어서 살만한 간식거리가 있는지 보려고 다가갔는데, 카페 뒤로 커다란 놀이터가 보였다. 아이들의 재기발랄한 웃음소리가 너무 귀여워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놀이터로 향했다. 우리는 놀이터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그곳의 직원이 아이들이 있는 부모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우리는 입장을 금지당했다. 우리는 실망했지만, 이내 오히려 좋은 규칙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입장하는 것을 제한함으로써 아이들은 안전한 환경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놀이터는 과거 영국의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정식 명칭은 다이애나 메모리얼 놀이터(Diana Memorial Playground)이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영국 사람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영국인이 그리워하며 그들의 가슴 속에 묻혀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영국 곳곳에는 그녀를 기리는 흔적을 정말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이 놀이터도 그 중 하나이다. 그래도 많은 흔적들 중에서, 이곳이 생전 아이들을 정말 좋아했던 다이애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짝꿍도 이 놀이터를 보면서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마치 아이들을 너무 좋아했던 그녀의 품 안에서 아이들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고 했다.
이 놀이터를 끝으로 우리는 켄싱턴 정원을 빠져나왔다. 이곳을 빠져나오자 어김없이 런던 시내의 복잡한 거리가 나타났다. 공원의 출입문 하나만 지났을 뿐인데 우리 앞에 나타나는 풍경은 너무 많이 달라졌다. 이제 우리는 다음 장소를 향해 가야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