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튼 볼링장
브라이튼에 사는 동안 집과 학원을 제외하고 내가 가장 많이 갔던 장소는 어디였을까. 브라이튼 피어일 수도 있고, 해변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내가 항상 빼놓지 않는 장소가 브라이튼 마리나(Marina)이다. 마리나라 함은 요트 정박지를 뜻하는데, 내가 왜 이 곳에 자주 가게 되었는지 오늘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는 새로운 곳에 여행을 갈 때마다 그 지역을 한 바퀴 걸어보는 것을 좋아한다. 교통수단을 타고 빠르게 지나갈 때와 다르게 걸으면 눈에 들어오는 것이 더 많아지고 그 지역과 더 친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라이튼에 도착하고 어느정도 적응이 된 후에 브라이튼 주변을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날, 브라이튼 해변에서 바다를 바라보다가 바닷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정해진 목적지도 없었고, 얼마나 걸어야지 하는 목표도 없었다. 그저 바다가 좋아서, 바다에 끌리듯이 걷게 된 것이다.
드넓게 펼쳐진 바다와 수평선 뒤로 모습을 감추려고 하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꽤 한참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 앞에 브라이튼 마리나라는 이름이 나타났다. 이렇게 브라이튼 마리나를 처음 가보게 되었고, 이 때만 해도 이 곳이 그저 요트를 정박해 놓는 장소라고만 생각했다. 정박해 놓은 요트가 정말 많았고, 그 주변으로 건물들도 꽤 많았다. 그렇게 이 날은 마리나를 대충 둘러본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자주 오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 때는 그저 한 번 둘러본 것으로, '이곳에 마리나라는 장소가 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마리나를 다시 찾게 된 것은 두 달 정도가 지난 후였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뭐할지를 이야기하다가 마리나에 볼링장이 있다는 사실을 얼핏 듣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잘 치는 건 아니지만 평소에 볼링 치는 것을 좋아해서 볼링장에 한 번 가보자고 했고, 친구들도 영국의 볼링장이 궁금했는지 선뜻 따라나섰다. 이렇게 마리나에 두번째로 가게 되었고, 이 때는 볼링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가게 된 마리나는 새로웠다. 이전에 혼자일 때는 마리나 외부만 둘러보고 가서 안에 뭐가 있는지 몰랐었는데, 안으로 들어서니까 꽤 다양한 공간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장소는 아무래도 볼링장이었다. 친구들과 재밌게 볼링을 치고 바로 옆에 있는 식당에 가서 밥도 먹으면서 브라이튼 마리나와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었고, 이후 한 주에 한 번 이상은 볼링을 치러 마리나에 가게 되었다. 때로는 맥주를 마시면서 볼링을 치기도 했고, 다 치고 힘들면 옆에 있는 아즈다(ASDA)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먹기도 했다.
브라이튼이라는 동네가 도시로 분류되긴 하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크지는 않다. 그래서 친구들과 만났을 때 생각보다 할 만한 것이 다양하지 않다. 더군다나 영어로 된 영화밖에 없기 때문에 영화관도 감히 가지 못했고, 유학생이었던 나는 카페, 식당, 바닷가 정도만 왔다갔다 했었다. 그렇게 두 달 넘게 시간을 보내는 중에 볼링장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알게 된 이후로 나의 일상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예전에는 친구들과 만나서 딱히 할 게 없으면 '카페 갈까?' 또는 '바다 보러 가자'라는 말이 주로 나왔었는데, 이제는 '볼링 치러 가자'라는 새로운 문장 하나가 추가되었다.
더욱이 마리나까지 가는 길이 해안가를 따라가기 때문에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바다가 정말 아름다웠다. 2층 버스의 2층 맨 앞에 앉아 있으면 마치 놀이기구를 탄 것 같은 기분도 살짝 들면서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브라이튼을 떠나기 전까지 마리나와 매주 한 번씩은 꼬박 만나는 사이가 되었고, 지금도 브라이튼을 떠올리면 그곳에 있는 볼링장과 친구들과 함께 갔던 식당들이 떠오를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