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Rye)
오늘 소개할 라이(Rye)라는 동네는 내가 영국에서 가봤던 동네 중에 손에 꼽을만큼 규모가 작은 곳이다. 영국 동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삼십분만 돌면 온 동네를 다 돌 수 있을 정도로 동네 규모는 작다. 이렇게 작은 동네는 나는 왜 굳이 찾아갔던 것일까.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브라이튼에 머무는 동안 나는 거의 매주 빠지지 않고 그 주변을 돌아다녔다. 기차를 탈 때도 있었고, 버스를 탈 때도 있었다. 아주 멀리까지 가서 하루나 이틀 밤을 자고 오는 경우도 많았다. (먼 거리의 동네는 차차 소개할 것이다.) 그러던 어느 주말, 지도를 보면서 브라이튼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올 만한 곳을 찾아보고 있었다. 가까운 곳은 많이 다녀왔고, 또 너무 멀면 당일치기로 갔다오기 애매해서 적당한 거리에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그렇게 한참을 지도를 뚤어져라 쳐다보다가 라이라는 동네가 눈에 들어왔다. 왜 이 동네가 눈에 들어왔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순간 그 이름에 끌렸고 다음 날 나는 라이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라이는 브라이튼에서 약 2시간 정도 걸리는 곳으로, 지난 번에 소개했던 해이스팅스(Hastings)에서 동쪽으로 더 가야한다. 영국 지도를 보면 남동쪽 거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꽤 오랜 시간 기차를 탄 끝에 라이에 도착했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라이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보기도 했는데, 워낙 작은 동네다 보니까 딱히 정보가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한 번 가보자는 심정으로 기차역에 도착했고, 라이라는 동네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기차역을 빠져나와서 동네 중심부로 향했다. 동네 중심이라고는 하지만 동네 자체가 워낙 작아서 가게 자체가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여럿 있어서 그곳에서 판매하는 물건을 보는 재미가 꽤 있었다. 그리고 예상 외로 라이라고 써져있는 기념품 마그넷(Magnet)도 있었다. 그 마그넷을 보면서 '영국 사람들은 나름 찾아오는 동네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관광객이 찾지 않는 곳이라면 여행용 기념품을 아예 판매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나처럼 그냥 이유없이 영국의 작은 동네가 궁금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일까.
그렇게 천천히 동네 이곳저곳을 둘러봤는데도 금방 동네 구경이 끝나버렸다. 그래서 라이 한쪽에 자리잡은 라시 캐슬 박물관(Rye Castle Museum)을 찾아갔다. 평화롭기만 했을 것 같은 이 작은 동네에도 과거에는 전투가 있었는지, 라이에도 성이 지어져 있었다. 성이 크지는 않았지만 전형적인 영국의 고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라이가 바다에서 가까워서인지 성에 있는 대포의 포신이 바다를 향해 있었다. 이 작은 동네까지도 침략과 방어의 역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라이 성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드넓은 평원이 보인다. 라이 근처에서 세 개의 강(로더 강; River Rother, 틸링햄 강; River Tillingham, 브레데 강; River Brede)이 만나고, 하나로 합쳐진 로더 강은 영국 남쪽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로더강이 거대한 삼각주와 습지를 형성하는데, 라이 성에서 그 습지가 평원처럼 넓게 펼쳐져 있다. 내가 찾아갔던 날이 흐려서 시야가 조금 짧았는데, 맑은 날은 과연 바다가 보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차가 있었다면 습지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라이 성 옆에는 세인트 메리교회(St. Mary Church)가 있다. 영국에 살면서 성당이나 교회를 워낙 많이 들어가봐서 이 교회는 안에까지 들어가지는 않았다. 외부에서 보더라도 오랜 역사를 간직한 교회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교회가 오랜 기간동안 라이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면서, 그들의 희노애락을 함께 지켜봤을 것이다. 영국은 아무리 작은 마을도 이렇게 교회나 성당이 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기쁨을 서로 나누고 슬픔을 함께 애도한다.
교회를 끝으로 라이 동네 한바퀴가 끝이 났다. 2시간 남짓 돌아가야 하는 길이 남아있어서 라이에서의 일정을 조금은 빠르게 끝냈다. 이렇게 생각하면 동네가 작아서 오히려 더 좋았던 것이 아닐까. 라이 기차역으로 오는 길에 이전에 들렀던 소품가게에서 라이 마그넷을 하나 샀다. '내가 영국에서 이런 곳까지 가봤다!'라고 나중에 자랑도 하고 기억도 하기 위해서는 그 기억을 매개할 수 있는 소품이 하나 필요했다. 그리고 그 마그넷은 여전히 잘 간직하고 있다.
라이는 전형적인 영국의 모습을 간직한 동네이다. 그래서 작더라도 2시간 남짓 기차를 타고 찾아간 것이 결코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작은 동네를 더 많이 찾아가 보고, 기회가 된다면 기차역조차 없는 정말 영국의 시골 마을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에서 사는 동안 그 기회가 과연 찾아왔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앞으로 이 브런치에서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