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라는 신기루
라스베이거스에 방문하는 사람들의 주 목적지는 크게 두 가지다. 라스베이거스의 스트립과 그랜드 캐니언. 그랜드 캐니언은 우리처럼 해외여행으로 미국에 온 경우 라스베이거스와 함께 둘러보곤 하지만, 그 거리가 짧지 않아 이동 시간이 꽤 걸린다. 게다가 캐니언의 종류도 브라이스, 엔텔롭, 홀슈밴드, 그랜드, 자이언 등 종류가 다양해 일정을 길게 잡을수록 이동거리가 배가 된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도 한 번쯤은 그랜드캐니언에 방문하지만, 다음부터는 라스베이거스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재밌는 쇼를 보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내게 휴양지는 언제나 자연이었다. 수영장에서 놀지언정, 근처에는 해변이 있었고 산이 있었다. 그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호텔에 있더라도 그 경관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라스베이거스는 아니다. 라스베이거스는 그랜드캐니언이라는 천혜의 자연경관이 있지만 그 거리는 상당하다. 그랜드캐니언 때문에 라스베이거스의 ‘스트립’이 발전했다는 말은 조금 무리가 있다. 오히려 자생적으로 발전한 라스베이거스 덕분에 그랜드 캐니언에 방문하는 게 수월해졌다는 편이 더 옳다. 즉, 우리는 라스베이거스 호텔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더라도, 자연을 만끽할 수 없다. 보이는 건 공허한 사막뿐이다. 오히려 라스베이거스를 수놓는 싸구려 네온사인과 현란하게 돌아가는 슬롯머신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경험한 도시 중, 이런 도시는 이전에 없었다. 휴양지라고 할지라도, 관광객의 니즈를 맞추기 위해 어느 정도 시가지가 형성되는 것은 당연하다. 자연적으로 맛집도 생기고 술집도 생기고 쇼핑센터도 생긴다. 하지만 이것들은 다 관광객들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반찬’에 불과하다. 맛집이야 서울에도, 뉴욕에도, 도쿄에도 있고 쇼핑센터도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라스베이거스는 작정하고 그것만을 위한 도시였다.
호텔들은 스트립이라는 공간에 모여 관광객들을 모은다. 여기까지는 여느 휴양지와 다를 바가 없다. 라스베이거스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호텔들의 ‘콘셉트’이다. 호텔들은 각자 개성이 뚜렷하다. 뉴욕, 베네치아, 파리 등 세계적인 도시를 콘셉트로 하는 호텔들도 있고 시저스 팰리스, 룩소르 등 시대에서 모티브를 딴 호텔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플라밍고를 직접 키우기도 하는 플라밍고 호텔, 보물섬을 콘셉트로 한 트레져 아일랜드 등 각 호텔들이 각자만의 개성으로 호객을 하고 있다. 세계 어디에서도 이런 특징들을 가진 호텔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을 보기는 쉽지 않다.
라스베이거스는 즐길거리도 굉장히 다양하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커스단인 태양의 서커스단이 라스베이거스에서 상설 공연을 하고 있다. 그 종류도 정말 방대한데,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오쇼, 카쇼, 르 레브 쇼뿐만 아니라 각 호텔에서 많은 쇼들이 매일매일 열린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떠오르는 Beatles Love, Michael Jackson 'One' 쇼처럼 역사적인 가수들의 노래를 담은 퍼포먼스도 있고 쥬 매니티, 아웃백 등 Sexual 한 쇼도 준비되어 있다. 여유가 없다면, 벨라지오 호텔 앞에서 펼쳐지는 분수쇼와 미라지호텔의 화산쇼도 무료로 매일 준비되어 있으니 이런 것들만 봐도 알차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음식점은 또 얼마나 많은지, 많은 관광객들의 지름을 돕는 명품샵이나 옷가게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부 식음료 가게였다. 다른 도시나 국가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음료도 팔았고 디저트도 다양했다. 고든 램지와 볼프강이 직접 운영하는 다이닝 레스토랑부터 호텔 뷔페,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까지 관광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었다.
퍼즐처럼 호텔들이 들어섰고 사람들이 음식점을 차렸다. 사람들이 모이면서 쇼가 열리고 쇼핑센터가 들어섰다. 모든 것들이 자연적으로 하나씩 들어서면서 라스베이거스라는 도시를 만들어냈고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도시가 됐다.
참 인간 중심적인 ‘여행지’라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꽃들이 예쁘게 피어있지만 그마저도 호텔 안에서 관리된다. 인간의 관리 없이 사막 속에서 살아가는 건 요원한 일이다. 뿐만 아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즐길 거리 중 단연 최고로 뽑히는 태양의 서커스의 쇼들은 가히 인간이 신체로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의 정수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런 쇼가 하루에 한 번도 아니고 하루에 몇몇 호텔에서 여러 가지 주제로 열린다.
사실 이렇게 척박한 환경 속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사막에서 싱싱한 재료로 고급진 음식을 만들고 밤에는 네온사인으로 빛을 수놓는 건 자연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다.
자연도 못하는 일을 해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조형물은 ‘분수’다. 분수는 자연의 힘을 받아 떨어지는 폭포와는 정반대의 방향성을 지녔다. 중력의 방향에 반해 움직이며, 물든 어느 지점에서 흩어진다. 이런 특징 때문에 분수는 자연의 힘을 거스르려는 인간이 욕망이 투영된 조형물이라고 많이 표현한다. 이런 분수가 벨라지오 호텔 앞에 놓인 음악 분수를 비롯해 많은 호텔들을 꾸미고 있다. 라스베이거스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아닐 수 없다.
파리스 호텔을 거닐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간 이 거리에도 사람들이 사라지겠지?’
내가 본 라스베이거스는 정말 화려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다니는 경우는 크리스마스나 새해 카운트다운 정도에 불과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 인파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것엔 모두 흥망성쇠가 있는 법이다. 지금은 어느 도시보다 화려한 라스베이거스도 쇠락할 것이다.
내가 묵었던 더 코스모폴리탄과 윈·앙코르, 아리아 호텔들을 보면 조금씩 그 변화가 보인다. 이들은 모두 최근에 지어진 호텔이다. 한눈에 봐도 다른 스트립 호텔들과는 다른데, 모두 현대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매끈한 외관과 전면 유리는 그 모습이 고급스럽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벨라지오 호텔이나 마지막 날 묵었던 베네시안 호텔과도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베네시안과 코스모폴리탄 호텔에 묵었는데 사실 그 경험적인 면에서 큰 차이는 없었다. 코스모폴리탄의 외관이 현대적이고 내부도 깨끗한 것은 맞지만 베네시안이 청결도 때문에 코스모폴리탄에 뒤진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겐 베네시안이 준 경험이 더 만족스러웠다. 그 컨셉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를 본뜬 하늘과 곤돌라는 그 규모가 도시에는 못 미쳤지만 내 이목을 집중시키기엔 충분했다. 진주를 직접 열어서 장신구를 만들어주는 점포 등 재미있는 아기자기한 가게들도 많이 있었다.
반면에 코스모폴리턴 호텔은 맛 좋은 레스토랑과 괜찮은 수영장이 있었다. 분위기 좋은 카페와 바, 그리고 유명한 클럽이 있다. 분명히 좋은 호텔인 건 사실이지만, 이런 호텔들이야 내 주변 도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미국까지 올 것도 없다. 규모는 조금 작더라도, 서울이나 부산에 가도 이만한 숙소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내가 ‘라스베이거스’에 오지 않아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호텔이다. 내가 사막 한복판에 건설된 라스베이거스에 온 이유는 뉴욕, 파리, 홍콩 등의 다른 팬시한 도시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호텔에서 묵고자 온 게 아니다. 그만의 특징이 있기 때문에 라스베이거스가 지금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
베네시안 정도까지는 아직 그 규모나 분위기가 코스모폴리탄에 뒤지지는 않는다고 느꼈지만, 그 전 세대의 호텔들은 조금 달랐다. 파리스 호텔만 하더라도 그 특색이 확실한 것과는 별개로, 에펠탑, 개선문, 열기구 등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조금은 저렴하고 오래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카펫에 밴 담배냄새도 그 호텔의 경험을 반감시키는 한 가지 요인이었다. 시저스 호텔, 뉴욕뉴욕도 마찬가지다. 이미 호텔 정보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별점은 조금씩 내려가고 있고 그만큼 숙박비용도 저렴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라스베이거스에 방문하는 이유는 카지노겠지만, 카지노가 모인 특색 있는 거리인 ‘스트립’이 가진 개성을 보고자 전 세계에서 라스베이거스에 방문한다. 하지만 이미 들어서고 있는 특색 없는 현대적인 호텔(윈·앙코르, 더 코스모폴리탄, 아리아 등)들은 스트립의 영광을 함께 한 기존의 호텔들을 멋없게 만들고 있다. 조금은 오래됐고 구식이고 직접 숙박하기보다는 근처 현대적인 호텔에 머무르고 시설만 이용하는 호텔이 되고 있다.
10년 뒤에도 스트립은 비슷한 모습일 것이다. 20년 뒤에도 그렇다.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을 것 같다. 지금도 파리스, 플라밍고, 시저스 호텔은 뒤처진 모습을 보이는데 20년 뒤라면 그 차이는 현격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베네시안이나 벨라지오와 같은 호텔도 많이 노후화가 진행될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그 호텔들을 소유한 MGM, 시저스, 샌즈 등의 그룹이 그 자리에 조금 더 현대적인 호텔을 세울 텐데, 새로운 호텔들의 모습은 이미 이전에 건설된 호텔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런 호텔이 들어선 라스베이거스의 모습은 내겐 절대 매력적이지 않다.
라스베이거스의 지금 모습이 좋다. 세상에 둘은 없는 도시 같다. 특별하고 독특하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퀄리티의 쇼가 매일 밤 열리고 맛있는 음식들로 점심, 저녁을 채울 수 있고 밤하늘만큼이나 빛나는 슬롯머신들이 지천에 널려있다. 라스베이거스를 처음 방문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호텔을 잡았다. 그 호텔이 더 코스모폴리탄과 베네시안이었다. 둘 다 훌륭한 호텔이었고 둘을 비교해 볼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다음에는 저렴하더라도 특색 있는 호텔에 머물러보고 싶은 욕심도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 라스베이거스도 조금씩 변할 테다. 자연스럽게 변하며 지금의 기억과는 또 다른 경험을 10년 뒤, 20년 뒤에도 또 느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