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가 주는 질문들.(3)
야구는 크게 보면 점수를 내는 게 주목적이지만, 각 포지션과 타순마다 역할이 조금씩 다르다. 대략적으로 그 목표와 가져야 할 덕목 등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밥상을 차리는 타순이다. 기회를 살리는 타순이 아니라 기회를 만드는 타순이다. 클린업 트리오에 앞선 순번에 배치되며, 타율보다는 출루율이 중요시 여겨진다. 볼넷이든, 안타든 무조건 살아서 나가는 게 목표다.
차려진 밥상을 기회로 만드는 타순이다. 이들의 목표는 루상에 있는 타자들을 최대한 많이 홈으로 불러오는 것. 같은 안타라도 멀리 타구를 보낼수록 주자가 한 루라도 전진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파워를 갖춘 선수들이 클린업 타선에 배치된다.
이들은 공격보다는 수비에서 더 큰 역할을 맡는 타자들이다. 수비 능력이 중요시 여겨지는 포수, 유격수, 2루수 등이 보통 많이 배치된다.(유격수와 2루수는 스피드를 갖춘 경우가 많아 테이블세터에 배치되기도 한다.) 한국의 KBO 리그에서는 보기 어렵지만, 메이저리그의 내셔널리그는 지명타자 제도가 없고 투수가 타선에 들어선다. 범가너나 그레인키처럼 타석을 즐기는 투수가 아닌 이상에야, 결국 번트로 진루를 시키거나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대부분 9번 타순에 배치된다.
* 이런 분류는 현대 야구에 잘 맞지는 않는다. 9번 타선에 1, 2번과의 연계성을 고려해 타율 혹은 출루율이 좋은 타자를 배치하는 경우도 있고 요즘 들어서는 테이블세터인 2번 타자에 강타자를 배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글은 포지션마다 가져야 할 덕목을 엄격하게 나누고 설명하고자 쓰는 글이 아니다. 야구에 다양한 능력이 필요로 한다는 예시를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타순에 따라 역할을 달리 부여받는다. 정확한 분류 방법은 아니지만 야구에 있어서 타자로서 다양한 성공 방법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에는 충분할 것이다. 크게 타/출/장(타율/출루율/장타율) 성적이 타자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타율, 출루율, 장타율이다. 타율은 순수하게 방망이로 투수가 던진 공을 쳐서 안타로 만든 비율이다. 출루율은 안타나 볼넷, 사구 등으로 어떻게든 타자가 1루를 밟는 비율을 뜻하고 장타율은 1루타와 3루타의 가치를 달리 평가하는 지표로 홈런, 3루타 등이 더 높은 가치를 받는다.
야구에 있어서 ‘타출장’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도루 혹은 단타도 장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주루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수비 능력이 중요하다. 수비 능력이 중요시 평가되는 포지션은 포수, 유격수, 2루수, 중견수가 있다. 이들은 1루수, 좌익수, 우익수, 3루수보다 타격이 뛰어나지 않아도 주전 선수로 뛰는 것이 가능하다. 특히 포수의 경우는 투수와 ‘배터리’로 함께 경기를 진행하며 투수들의 볼배합이나 바운드된 공을 블로킹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래서 포수는 타율보다는 투수와의 궁합으로 주전이 결정되기도 한다.
이렇게 야구선수들이 가져야 할 특징은 다양하다. 힘이 좋아 어떤 타구도 담장을 넘길 수 있는 능력, 선구안과 컨택 능력이 좋아 좋지 않은 볼을 걸러내고 좋은 공을 안타로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다. 게다가 발이 빠르다면 단타로 장타의 효과를, 도루를 통해 진루도 가능하다. 수비에서는 또 무엇이 중요한가. 넓은 수비 범위, 외야에서 홈까지 레이저 송구가 가능한 강한 어깨, 타구를 판단할 수 있는 센스까지. 몸의 모든 부위를 사용하고 단련해야 하는 스포츠가 야구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야구선수는 없다. 보통 타격 힘이 좋으면 발이 느리기 마련이고, 힘든 포지션을 맡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령, 중견수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더라도, 감독이 체력 안배를 위해 1루수로 보직을 이동시킨다. 분명 MVP급 활약을 하는 마이크 트라웃이나 코디 벨린저 같은 선수들은 수비 범위도 넓고 홈런을 칠 수 있는 파워도, 도루를 할 수 있는 주루 능력도 좋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갖지 않아도 높은 연봉을 받고 전국적으로 인기를 누릴 수 있다. 스즈키 이치로를 보고 어느 누구도 ‘파워히터’를 떠올리지 않고 마차도를 보면서 어느 누구도 최고 수준의 수비를 기대하지 않는다. 스타들도 각자가 강점을 가지고 있는 능력 혹은 기술이 있는 것이다.
야구는 확률의 게임이다. 선발 라인업을 구성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상대 투수의 특징이다. 좌투/우투인지 많은 변화구를 던지는 팔색조 같은 투수인지, 불같은 직구를 던지는 파이어볼러인지 등을 종합해서 라인업을 구성한다. 그리고 불펜 투수가 가동되면 그에 따라 선수들도 교체된다. 상대적으로 높은 타율을 지닌 타자를 내놓거나, 커트로 상대 투수로 하여금 많은 투구를 하게 만드는 선수들이 기용된다. 모두 확률이란 데이터에 기반한다.
많은 야구 지표가 있다. 타율, 장타율과 같은 직관적인 데이터를 한 번 개량해서 만드는 세이버 매트릭스라는 방법론도 있으니 선수를 평가하는데 활용되는 데이터는 무궁무진하다. 가끔 야구 중계를 보면 타자의 모든 것을 분석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치밀하다. 이렇게 많은 데이터를 요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야구를 몇 가지 툴로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성공하는 선수들이 많다. 타율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선구안이 좋거나 끈질기게 투수와 승부를 가져간다면 출루율은 높을 수 있다. 출루율이 높다면 테이블세터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 타율과 출루율이 좋지 않아도 홈런을 적재적소에 때려낼 수 있는 타자라면 지옥에서라도 데려올 것이다. 타자뿐만 아니라 투수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ERA(평균자책점)을 가진 투수라도 많은 삼진으로 타자를 돌려세우는 투수가 있는 반면, 수비가 처리하기 쉬운 땅볼로 유도해 아웃카운트를 잡는 투수도 있다. 아웃카운트를 만드는 방법은 각자 다르지만, 어느 투수가 좋은지를 딱 특정하기는 어렵다. 수비가 나쁜 하위권팀이라면 삼진을 잡아내는 투수를 선호하겠지만, 어차피 이들을 잡을 수 있는 팀은 자금력을 갖춘 상위권팀이다.
다양성,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지 않았나?
미국의 4대 스포츠인 미식축구와 농구, 하키를 보면 각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모두 상대와 직접적인 신체접촉이 많아 몸집이 일반인의 수준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키가 2m를 넘는 경우는 다반사고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근육질의 선수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미국의 스포츠가 많은 신체 접촉이 있기 때문에 이런 선수들이 톱레벨에 살아남는 것이다. 그리고 미식축구와 하키를 하면 부잣집 백인을, 농구는 중산층 수준의 흑인을 떠올린다. 그렇기에 NBA, NHL, NFL 무대 어디에서도 신체적으로 백인과 흑인에게 뒤처지는 아시안계를 보기 어렵다.
내가 동아시아에서 왔기 때문에 다른 스포츠보다 야구에 익숙한 것은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추운 날씨의 동구권에서 왔다면 NHL을 주로 즐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양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국을 상징하는 스포츠로 야구를 뽑는데 이견이 없을듯하다. 야구를 보면 다양한 인종들을 볼 수 있다. 체격이 왜소한 아시안계, 남미계의 히스패닉, 백인, 흑인 선수까지 시장 저변은 가장 협소한 4대 스포츠 일지 몰라도 그 무대에서 뛰는 미국인들의 배경은 어느 스포츠보다 다양하다.
내가 미국에 오기 전에 막연히 상상했던 미국의 모습은 항상 백인 천지였다. 아시안계도 적지 않았지만, 아시안들은 대부분 학자들이었다. 이는 매스컴에서 비춰주는 미국의 모습 그 자체다. 히스패닉과 흑인도 적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사실 알기 어려웠다. 어느 매체도 그들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으니까.(아시안도 내가 아시안이라 관심을 가질 뿐 이들과 매 한 가지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 보니, 정말 다양했다. 유럽계 백인뿐만 아니라 남미 출신 히스패닉, 아프리아 아메리칸, 네이티브 아메리칸, 아시안도 정말 많았다. 세계 속에 산다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NBA는 미국의 많은 흑인들을 담는다. 미식축구와 하키는 백인들을 담는다.
야구는 미국 속 세계를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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