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으로 쓴 서사시, 지옥의 문

조각으로 쓴 로댕의 세계관

by GOYA

필라델피아 미술관에도 다양한 전시물들이 있지만, 필라델피아에서 최고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아니라 ‘로댕 미술관’이다. 필라델피아 로댕 미술관은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동명의 미술관 다음으로 많은 로댕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전시하고 있다. 조각가로 갖는 명성은 미켈란젤로 다음가는, 그리고 어쩌면 ‘The Kiss’나 ‘Thinker’ 같은 매력적인 유명 작품 덕분에 그의 우상인 미켈란젤로보다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로댕’이다. 그리고 필라델피아는 그의 수많은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KakaoTalk_20191121_225007963_07.jpg 로댕의 심벌 같은 조각, 생각하는 사람(Thinker)

처음 로댕 미술관 홈페이지에 들어갔을 때 약간 의아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칼레의 시민, 지옥의 문, 생각하는 사람 등 The Kiss(모조품)를 제외하고 모두 소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칼레의 시민과 세 망령(The Three Shades), 지옥의 문은 관리하기 여간 까다로운 미술관 외부에서 전시되고 있었다. 그것도 무료로. 분명히 필라델피아 로댕 미술관에도 양질의 작품들이 있다고 듣기는 했으나, 소장품의 퀄리티가 ‘유명 조각가’의 컬랙션 수준이 아니라 조각가의 역작들이 모두 필라델피아에 있을지는 몰랐다.

조각이 가진 특징을 내가 착각하고 있었다. 대리석 조각과는 다르게 청동 조각은 유일하지 않았다. 관련 서적에 따르면, 청동 조각은 거푸집을 가지고 만든다고 한다. 거푸집만 있다면 수 십 개의 진품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거푸집을 관리하는 프랑스 정부는 작품의 가치를 희석시키지 않기 위해 그 수를 관리한다고 한다. 그러니 여기에 있는 작품들 모두 진품이고 파리에 있는 것도 진품인 것이다. 반대로 한국에서 전시를 하기도 했었던 The Kiss라는 작품은 대리석으로 조각했기 때문에 이 곳에 전시된 작품에는 모조품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조각계의 슈퍼스타 미켈란젤로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굳이 따지자면 조각의 매력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내게 로댕이 특별한 이유는 그의 세계관이다. 피렌체에 위치한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을 보고 감명을 받아 자신도 문을 만들겠다면서 정말 오랫동안 작업한 작품이 ‘지옥의 문’이다. 여느 역작들처럼 지옥의 문도 미완성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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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 - 한국어 번역) 천국의 문이 있으니, 나는 지옥의 문을 만들어야지! - Rodin


인상파 이전 회화 최고의 슈퍼스타들만 모아 놓은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서 유독 사람들이 운집시키는 작품이 있다.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다. 2016년에 방문했던 루브르 박물관에서 나는 굳이 모나리자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냥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곳이니까. 시끄러운 곳을 가면 됐다. 모나리자가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신비로운 미소,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천재, 스푸마토 기법, 모델에게서 느껴지는 우아한 기품 등이 있겠지만, 모나리자가 그 인기를 받을 가치가 있는 이유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평생을 함께 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천재라도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반인의 그것과 같았다. 해부학, 유체역학, 기계공학, 미술을 모두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가 완성한 예술품이 10점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그가 피렌체에서, 로마에서, 파리에서 작업을 할 때에도 평생을 따라다닌 작품이 모나리자다. 그의 서사가 담긴 작품이기에 모나리자가 다른 회화들보다 가치를 갖고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다빈치의 서사를 모나리자가 계승했다면, 로댕의 서사는 단연 지옥의 문이다. 지옥의 문은 로댕이 이탈리아 여행을 할 때, 피렌체 두오모 성당 앞에 놓인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 작품도 결국 신곡의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으니, 기베르티, 단테,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아 탄생시킨 작품이 지옥의 문이다. 예술가들끼리 영향을 받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옥의 문이 특별한 이유는 그가 이후에 갖는 행보다.

로댕은 지옥의 문을 완성하지 않은 채, 많은 작품에 손을 댄다. The Kiss, Thinker, The Three Shadow 등등. 그런데 이들의 모습을 똑같이 지옥의 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조금 모습은 작아졌지만 지옥에서 분명히 그들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인다. 생각하는 사람, 키스, 세 망령 등이 모두 한 작품의 조각(부분)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로댕 미술관에 소장된 많은 작품들 설명에는 작품에 대한 내용과 함께 지옥의 문에서 이 조각의 좌표도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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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문이 내는 수수께끼, 보물찾기

말 그대로 ‘지옥의 문’은 로댕이 만든 서사요, 세계관이다. 지옥의 문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그의 모든 것을 창조했다. 그 부분조차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니, 말해 무엇하리.

로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와중에 조금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다. 그는(찾아보기 전까지는 그녀로 알고 있었다.) 로댕의 작업실에서 조수로 오랫동안 일을 했다. 문학, 특히 시에는 문맹인 나조차 그의 이름은 익숙하다. 그의 작품은 모르지만,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시가 있다. 바로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다. 선생님이 뭐라고 설명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부르는 윤동주의 감정은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혹은 포근했던 옛 모습을 아련하게 떠올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그의 이름이 로댕이라는 또 다른 거장 앞에 놓여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 윤동주, '별 헤는 밤' 중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괜히 주변에 마리아 라이너 릴케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른 화가들의 작품들을 보면 가끔 내가 아는 사람들의 얼굴이 튀어나온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는 가죽만 남은 자신의 모습을 그렸으며, 고갱과 고흐는 생전에 아를에서 조그마한 단체를 만들었을 정도로 많은 교류를 하면서 서로의 그림에 상대를 등장시켰다. 마네와 모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미술이 아닌) 다른 예술가 집단과 교류한 흔적이 많지는 않다. 미술과 어느 정도 교점을 갖는 철학 분야에서나 니체, 프로이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모차르트가 어렸을 때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오스트리아의 어떤 궁전에 있다고 하지만, 그게 교류의 증거라고 보기엔 너무 어렸다.(어렸을 때부터 뛰어나기도 했다지만)


로댕은 레미제라블로 잘 알려진 빅토르 위고의 두상도 많이 조각했다. 한 전시장의 대부분이 빅토르 위고일 정도로 그 수량이 어마어마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 작가까지 2명의 위대한 작가에게 헌사하는 작품이 있었고 그의 인생에 등장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리고 그의 세계관을 구축하는데 일조한 ‘단테’까지. 그가 총명하지는 못했을 지라도, 최고의 문학적 자산을 가졌음에는 틀림없었다. 그의 책 같은 특이한 작업 방식도 결국은 이런 문학적 배경에서 나온 결과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KakaoTalk_20191121_225007963_06.jpg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보일듯하다.


1시간 남짓의 미술관 전시였지만, 충분히 알찼다. 큰 미술관은 더 많은 소장품과 가치 있는 작품들이 있지만 그 텀이 너무 길다. 가령, 동양에서 온 내게 동양의 것을 모사한 일본관, 한국관, 중국관은 그다지 흥미가 떨어진다. 나의 집 근처에 모사품이 아닌 진품이 있는데 타지까지 와서 그걸 볼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서양인들의 눈에는 그것이 신기하기 때문에 그 전시규모가 작지 않다. 결국 몇 분의 시간을 모사한 동양에 투자해야 하고 조금 지친다. 예술품도 마찬가지다. 내가 보고 싶은 시대가 있음에도, 혹여나 놓칠까 다른 시대의 작품들도 어느 정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불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루한 시간들이 조금 많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KakaoTalk_20191121_225007963_01.jpg 아무튼, 노블레스 오블리주! - The Burghers of Calais

이렇게 로댕의 작품과 여러 작가의 조각을 콤팩트 하게 볼 수 있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동상의 특성상, 그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대신에, 벽에 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 놓아도 감상하기가 쉬운데 칼레의 시민을 밖에 전시한 건 가히 신의 한 수라고 평할만하다. 칼레의 시민이 보여주는 표정과 상황은 절대 고요하지 않은 것인데, 미술관 내에 전시해놓으면 조각이 갖는 사실성 측면에서 그 가치를 상실한다. 조금은 소음이 들리고 낙엽도 떨어져 있고 비도 맞는 그런 곳에 조각이 있어야 이치에 맞다. 아무리 다시 주조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귀한 작품을 외부에다 그것도 무료로 관리 없이 전시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관람객의 경험을 배려해 준 덕분에 잘 즐길 수 있었다. 집 근처에 있는 미술관이니, 필라델피아를 떠나기 전에 한, 두 번 정도는 더 올 수 있을 테다. 또 보자!


제목 없음.png 생각하는 사람은 이게 원조. - 최후의 심판



사진 출처

https://www.florenceinferno.com/gates-of-paradise/


팟캐스트 '방구석미술관'에서 자료 습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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