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C-A-GO
전 세계에 위치한 도시들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한국에서 금융업에 종사하고 싶다면 서울로 가야 한다. 많은 문화를 즐기고 싶다면 역시 서울로 가야 한다. 자영업을 하고 싶다면 서울에서 하는 편이 좋다. 각자가 상경하는 이유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결국 한국 사회 ‘성공의 열쇠’는 서울이 가지고 있다. 서울에 살아야지만, 천만의 배후 인구를 내 잠재고객으로 가져갈 수 있고 같이 협업할 아티스트를 구할 수 있다.
이런 특징은 어딜 가나 비슷하다. 서구 기업들이 아시아 헤드쿼터를 설립하는 곳은 싱가포르, 홍콩이다. 이들은 각자 아시아라는 대륙에서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 역할을 맡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으로 인재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도쿄에서, 상하이에서 성공한 금융인들, 기업가들, 싱크 탱크들은 마치 ‘약속의 장소’라도 되는 것처럼 홍콩, 싱가포르로 모인다.
인간이 만든 도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이런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런데 미국은 조금 다르다. 다른 나라라면 하나의 수도 혹은 대도시가 맡아야 할 역할을 미국 전역에 조금씩 분산시켰다. 가령, 뉴욕은 세계의 수도이며, 패션의 본고장이자, 금융 중심지이다. 이처럼 뉴욕은 미국에서 가장 복잡하고 많은 기능을 부여받았지만 영화계에서 성공하고 싶은 감독, 작가, 배우들은 뉴욕이 아니라 로스앤젤레스의 할리우드로 향한다.(조지아주의 애틀랜타도 요즘은 매력적인 선택지로 각광받고 있다.) 기술 창업을 하기 위해서는 캘리포니아주의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정부 관계자, 싱크 탱크들은 당연히 워싱턴 DC로 간다. 보스턴은 세계 최고의 대학 2개를 비롯해 전미에서 알아주는 다수의 대학들을 보유하고 있다. 인재들을 모으고 교육시키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도박과 호텔을 위시한 라스베이거스는 미국의 MICE산업을 이끌고 있는 도시라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생산, 최근에 많은 부침을 겪고 있지만 필라델피아는 조선업을, 텍사스의 휴스턴은 석유 생산을 맡고 있다.
이렇게 미국의 도시들은 각자가 역할을 분산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의 본사들도 흩어져 있다. 미국에서는 Apple, Alphabet, Uber 같은 기업이 샌프란시스코와 그 부근에 본사를 두고 있는 것도, 로스앤젤레스에 수많은 스튜디오가 있는 것도, 라스베이거스에 거대한 호텔 체인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한국에서 국민 연금을 전라북도 전주로, 한국거래소를 부산으로, 정부청사를 세종시로 옮겼다고 갖가지 억측이 오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도시는 이처럼 미국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가 되었으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익숙한 이름이 빠졌다. 미국 3대 도시라고 불리는 시카고, 시카고는 왜 유명한가?
시카고는 동부의 뉴욕, 서부의 로스앤젤레스와 함께 중부를 대표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도시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뉴욕, 로스앤젤레스는 물론이고, 보다 작은 도시인 샌프란시스코, 보스턴과 같은 도시들보다 딱 와 닿는 이미지가 부족한 도시인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한국인에게는 익숙지 않은 미국의 중부지역에 위치하고 그들이 맡은 역할이 어쩌면 한국과는 조금 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카고를 네이버에 검색하면, 많은 블로그 정보들이 나온다. 상품거래소, 옵션거래소, 시카고 피자, 존 핸콕 센터, 야경, 윌리스 타워, 미시간 호, 재즈, 블루스, 마천루, 건축물 등등등. 이들은 크게 3가지 키워드로 나눌 수 있다.
경제, 예술(건축, 재즈), 그리고 농업이다.
시카고만 따로 놓고 보면, 시카고의 역할이 너무 뚱딴지같은 느낌이 있다. 금융과 농업은 어딘가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시카고는 중부를 대표하는 도시인만큼, 중부 전체를 놓고 그 역할을 논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이 사진은 시카고가 자랑하는 건축물 중 하나인 ‘마리나 시티’다. 시카고 강을 끼고 있으며, 지상에는 주차장과 거주지역이 있고 지하에는 요트 선착장이 있다. 듣던 바로는 강에 딱 붙어있기 때문에 지하로 주차공간을 내는 게 어려웠다고 하는데 그것보단 마리나 시티의 요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일부러 지하에 주차공간을 따로 넣지 않았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건축물을 보면서 사람들이 옥수수를 많이 떠올린다. 창문을 따라 알맹이가 톡톡 나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 건축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리노이는 ‘미국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곡물인 옥수수*를 주로 생산하는 대표적인 농업주다. 다른 농업 주인 미시간, 인디애나, 아이오와 같은 중북부 State들을 묶어서 팜 벨트(Farm Belt)라고 이야기한다. 시카고는 농촌 사이에 홀로 독야청청하는 도시라고 볼 수 있다.
시카고가 미국에서 뉴욕과 함께 금융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아무래도 농산품 덕분이다. 뉴욕에 Nasdaq과 NYSE 등의 현물거래소가 소재해 있다면, 시카고에는 CBOT(Chicago Board Of Trade/시카고 거래소), CME(Chicago Mercantile Exchange/시카고 상품거래소)등 파생상품을 주로 거래하는 거래소가 위치해 있다. 전 세계 곡물 70%가량의 가격을 결정하는 시장과 전 세계 30프로가량의 옵션 등을 거래하는 시장이 모두 시카고에 소재한 것이다. 선물, 옵션 등의 파생상품은 직관적인 주식과는 다르게 조금 어려운 구석이 있다. 백워데이션, 콘탱고 등 사용하는 용어도 영어스럽지 않고 일상생활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미래의 가치’를 판단한다는 개념 자체가 바로 서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나중에 사면되지 왜 지금 사지?’, ‘왜 권리를 사는 걸까?’, ‘이름이 도대체 왜 이런 식이지?’ 같은 궁금증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시카고와는 조금 동 떨어져 있지만, 선물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갈까 한다.
선물이라는 제도는 농업에서 나왔다. 쉽게 말하면, 이번 가을에 농사가 풍년이든, 흉년이든 체결한 선물 계약에 명시된 가격으로 사겠다는 것이다. 그 가격의 바운더리는 풍년일 때 가격과 흉년일 때 가격 사이로 결정이 된다. 이런 계약은 불확실성에 기인한다. 그 가격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농부 입장에서는 비싼 가격에 많이 팔면 좋겠지만, 그 가능성만큼이나 싼 가격에 조금 팔 수도 있다. 상인 입장에서도 그 위험성을 동일하다. 이런 불확실성을 결과적으로 계획을 짜는데 불필요한 노이즈를 발생시킨다. 선물 거래는 이런 불확실성을 제거해준다. 농부나 상인이나 한 명은 손해를 보는 제로섬 게임이지만, 가격을 안정화시켜 놓으면 예산 편성과 대처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동부의 대도시라고 할 수 있는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같은 도시들은 상공업이 발전했던 반면, 시카고는 농장 사이에 껴있는 대도시였다. 이런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 상공업이 발달한 뉴욕 주변과 아직 개발이 덜된 서부 대신에 농산품들의 가격을 결정하는 상품 거래소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 다른 도시에서는 극장에서나 먹는 간식인 팝콘이 시카고에서만 유독 인기를 끄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금융이 발달한 런던, 뉴욕, 홍콩 등을 이야기할 때, 하늘을 찌르는 듯한 마천루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금융의 도시인 ‘시카고’에도 세계적인 마천루 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뉴욕에 버금갈 정도로 깎아지른 듯한 콘크리트 협곡이 도로를 중심으로 나 있다. 정말 멋들어진 도심인데, 뉴욕이나 여타 세계적인 마천루 숲과는 조금 다른 색깔이 배경을 지배하고 있다. 전통적인 뉴욕에서는 회색빛 콘크리트 벽이, 현대적인 홍콩에서는 청색 유리벽이 빌딩 숲을 이루고 있는데 반해, 시카고는 검은색 빌딩들이 눈에 띄게 많다. 시카고를 대표하는 마천루는 존 핸콕 센터와 윌리스 타워다. 이 두 빌딩은 시카고의 끝과 끝에 서있어 마치 시카고 루프의 바운더리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 두 빌딩 모두 검은색이다. 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에 이름 모를 검은 빌딩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시카고 대화재 때, 그을린 도심을 흑림으로 표현한 것 같다.
알 카포네의 마피아, 흑인들의 설움이 녹아들어 있는 Jazz, 시카고 대화재, 파생상품 등 시카고는 어딘가 모르게 낮보다는 밤이 어울리는 도시다. 어두움이 익숙하고 그것을 숨기지 않고 내보이고 있다. 자신의 역사에 그것들을 새겨 넣었고 건물 등을 통해 표현했다.
내가 미국에 오기 전부터 와보고 싶었던 시카고다. New York, Los Angeles보다 더 오고 싶었다. San Francisco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마천루가 유명하다지만, 뉴욕에서도 충분히 빌딩 숲을 볼 수 있고 Jazz도 시카고만큼이나 뉴욕이 유명하다. 내가 San Francisco를 바랐던 건 Silicon Valley의 회사들 때문이다. 경제에 관심이 있지만, 거래소들이 내가 시카고를 찾아갈 당위성을 제공할 정도는 아니었다.
차분함 때문이었으리라. 시카고는 EverGreen 로스앤젤레스와는 대척점에 있는 도시다. 같은 도시지만 따뜻한 날씨, 평화로운 바다, 활기찬 영화산업의 Los Angeles라면, 시카고는 Lake Effect 때문에 바람도 많이 불며 흐린 날도 상당하다. 태평양은 평화로워 보였다면, 고요한 호수는 외로워 보였다. 소비자의 감정을 사는 영화와는 달리, 시카고의 거래소들은 냉철한 분석으로 미래의 수요를 예측하는 사람들을 모여들게 만들었다.
내가 다른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아니라 궁중화가임에도 서민들에 관심을 갖고 계몽적인 그림을 그려낸 Francisco De Goya를 좋아하는 것도, IU처럼 언제나 행복한 이야기를 풀지는 않는 가수들을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은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어두운 면모를 과감하게 드러냈다. 시카고도 마찬가지다. 그 도시의 마음이야 내 알 도리가 없지만, 그 도시가 풍기는 분위기, 어딘가 Chic(시크)해 보이는 Chicago라는 이름도 나의 코드에 맞았다.
비행기표를 발권하고 나서야, 시카고의 매력이 차고 넘친다는 사실을 알았을 정도로 무지했지만 시카고는 정말 멋진 도시였다. 해가 떠있는 시간에도 오롯이 서서 따스한 빛을 내뿜었던 가로등, 어두운 밤거리를 수놓았던 여러 불빛도, 그리고 그 속에 스며든 어두운 색채도 다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약간의 아쉬움을 남겨 놓았으니, 다시 봅시다. 시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