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만든 도시, 도시가 만든 사람.
여러 도시를 다녔다. 목적은 항상 조금씩 달랐다. 여행을 목적으로 방문하기도 했고, 교통 편의상 하루 정도 들르는 도시도 있었다. 그리고 로스 앤젤레스는 내가 첫 번째로 살아보는 도시다.
각 도시가 풍기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여행으로 방문했던 런던은 조금은 우울한 도시였고 바르셀로나는 하루 종일 행복이 가득한 도시였다. 이런 도시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날씨다. 내가 방문하는 며칠 간 날씨가 좋다면, 나는 그 도시의 분위기를 활기차게 기억하고 반대의 경우라면 우울한 분위기로 기억한다. 날씨가 도시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여행할 때만 국한된다. 여행은 짧은 시간동안 그 도시를 느껴야하기 때문에 그렇다. 도시에 직접 살아보면 도시의 순간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도시 자체의 분위기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그 분위기, 이미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건축물이다.
건축물은 날씨만큼, 도시의 분위기를 잡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 아야 소피아나 블루 모스크를 떠올리지 않고 이스탄불을 떠올린다는 것은 모순이다. 마찬가지로 바르셀로나하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파리하면 에펠탑, 그리스하면 파르테논 신전이라는 건축물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시의 분위기를 떠올릴 때 건축물이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떠올리는 건축물들은 그 나라의 가장 번영했던 시기에 세워진 정수다. 아테네에 파르테논이,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파리에 에펠탑이 있는 이유는 그때 그 나라의 문화 역량과 기술력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건축물은 그 나라의 문화와 기술력을 집약해 만든 산물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과거의 마지막 잎새랄까.
1~2개의 걸작들은 도시의 분위기 전체를 규정한다. 그 주위는 물론이고, 도시 전체에 이와 비슷한 모습을 한 건축물들이 죽 깔리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문화의 특징에서 비롯된다. 문화는 여유로워야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여유로웠던 시기에 도시 곳곳에 건물들이 들어서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문화의 정수인 건축물들과 시기를 같이 한다. 그렇게 도시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는 양날의 검이다.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 나라의 번영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새로운 기술들은 우후죽순 나타난다. 더 좋은 공법으로 예전에는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건축을 가능하게 하고 전보다 더 뛰어난 교통수단이 출현했음에도 번영의 시기에 깔았던 인프라와 기득권 때문에 도입하는데 굉장한 시간이 걸린다. 강남과 강북의 도로가 그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계획도시였던 강남은 세로, 가로 도로가 직사각형을 이루면서 이동에 불필요한 액션이 필요 없다. 직진과 좌회전, 우회전만 있을 뿐이다. 방향을 바꿀 때만 핸들을 돌리면 된다. 굉장히 단순하다. 하지만 과거부터 서울의 중심지였던 강북은 자연적으로 도로가 만들어졌다. 집이 있는 대로, 문이 있는 대로 구불구불 길이 트인다. 이 길은 걸을 때는 큰 불편함이 없지만 자동차를 타고 길을 지나기엔 너무 쓸데없는 핸들링을 요구한다. 이렇게 찬란했던 과거는 번영할 미래의 발목을 잡는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로스앤젤레스. 누구나 아는 영화의 도시, 할리우드의 도시다. 그렇다보니, 로스앤젤레스를 여행하는 많은 사람들의 블로그를 보면 영화 촬영지를 많이 방문한다. 500일의 섬머, 라라랜드 촬영지가 대표적인 여행지다. 그리고 과거에 번영했던 극장들도 많이 있다. 이는 로스앤젤레스가 성장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은 건물들이다. 이런 근대 이후의 건축물들이 아직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그 시대 향수가 아직 남아 있고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찾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고층빌딩들이 조그마한 마천루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곳을 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많이 없다. 아무래도 로스 앤젤레스를 마천루의 도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시카고, 뉴욕이라면 모를까.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미국이다. 미국의 모든 것은 효율성에 기인한다. 바둑판처럼 이뤄진 미국의 메트로폴리스들은 근대에 우후죽순 몸집을 키워나갔다. 이들의 역사도 도시에 담겨 있다. 영화의 로스앤젤레스와 마찬가지로, 금융의 뉴욕, 스타트업의 샌프란시스코 등 정말 많은 도시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도시의 역할을 보기 위해 미국의 도시들을 방문한다. 뉴욕에 가면 월스트리트도 걸어보고 패션의 중심지에서 쇼핑을 한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는 사람들 중 스타트업 본사를 방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직은 자신들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는 도시들이다. 하지만 이미 근대의 상징인 ‘효율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 않은가. 이제 획일화된 바둑판보다는 창의적인 무언가를 요구한다. 10년 뒤, 20년 뒤에도 미국은 최고일 것이다. 하지만 100년 뒤에도 미국과 이들의 도시가 세계를 지배하는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을까? 건축은 도시에 시간을 남긴다. 그리고 그 시간의 방향은 항상 과거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