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름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by GOYA
download-25.png 골드맨의 양말인 줄 알았던 그의 이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꽃, 김춘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중 하나인 김춘수의 ‘꽃’의 일부다. 교과서에도 수록되었을 정도로 한글의 유려함을 뽐내는 시다.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내게 꽃이라는 의미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기자기하고 예뻐서 자기소개서에 종종 써먹었던 기억이 있다.

이 시처럼 이름은 인간이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자신의 이름을 먼저 상대방에게 건네며 그다음으로 직장, 직위, 관심사 등을 나열한다. 만약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린 ‘검게 그을린 피부에 입술은 두툼하고 곱슬곱슬한 머리를 한 사람’따위로 상대를 기억했을 것이다. 이런 묘사를 했을 때, 누구든 주위에 떠오르는 사람 하나둘은 있을 것이다. 즉, 이렇게 외모로 상대를 묘사하는 것은 굉장히 범위가 넓을뿐더러, 정확히 누구를 ‘지목’ 해야 할 상황에 있을 때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름을 호명하는 것은 한 사람을 지목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한국에서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방법은 다양하다. 작명소에서, 집안 어르신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 부모님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도 있다. 이름은 쉽게 바꾸지 않기 때문에 아이는 거의 100년을 같은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부모님은 이름 속에 아이가 잘 자라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녹여낸다.

미국은 그렇지 않다. 미국은 이름이 천편일률적이다. 특이한 이름을 찾기는 어렵고 제이콥, 토마스, 피터, 알렉스 등 우리가 미국 영상매체에서 많이 들어본 이름들뿐.(아프리카계 아메리칸들도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들어보니, 이들의 Given name은 기독교 성인 혹은 역사적인 인물에서 따온다고 한다. 앞선 예시들은 각각 야곱, 도마, 베드로, 알렉산더에서 따온 이름들이다.

이처럼 역사적 위인, 기독교 성인들은 자신의 이름을 자신들 후손의 이름에 새겼다. 이들의 후손은 위인들의 이름으로 살아가지만, 마음 한편엔 자신의 이름도 어딘가에 남기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 같다. 역사책? 위인전? 그건 전 세계인 모두가 바라는 것이다. 보다 세속적이고 미국적인 그곳, 바로 ‘시장’이다.

한국의 유명한 대기업은 누가 뭐래도 삼성, 현대, SK(선경), LG(럭키, 금성), 롯데다. 이들 그룹 이름으로 창업주의 이름을 유추할 수 있을까? 삼성의 창업주는 이병철, 현대는 정주영, SK는 최종현, LG는 구인회, 롯데는 신격호다. 이들은 자신의 이름 그 자체로 역사에 기록됐고 우리에게 익숙할 뿐이다. 그들의 그룹명에 이들 이름은 한 글자도 섞이지 않았다. 반면에 미국의 기업들은 어떤가? 월트 디즈니의 창업주는 Walt Disney, JP 모건의 창업주는 John Pierpont Morgan, Ford의 창업주는 Henry Ford, Goldmansachs의 창업주는 Marcus Goldman과 그의 사위 Sam Sachs다. 그렇다면 보잉의 창업주는? 물어보나 마나, William Boeing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 반 이상을 종교 혹은 역사적 위인에게 할애했지만, 결국 그 자신의 이름은 주식시장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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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며 그들은 조물주에 의해 일정한 불가양의 천부의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그중에는 생명, 자유와 행복을 추 구할 권리를 포함하고 있다. - 토마스 제퍼슨


이런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미국의 철학적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철학이란 게 사유하기 재미있는 장난감 같은데 그 어휘 선택의 엄밀성 때문에 내 글의 취지와는 맞지 않아 글을 쓰는 데 있어 지양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로크의 ‘자유주의’는 공화주의, 캘비니즘(자본주의, 선민사상의 근간)과 함께 꼭 필요한 요소기 때문에 Rough 하게나마 짚고 넘어갈까 한다.(전공자가 아님을 유념하시고 흐름만 파악하시길)

국가는 무엇인가? 국가는 우리에게 굉장히 익숙한 개념이지만 추상적인 개념이다. 1500년가량을 통일된 역사로 살아온 우리에겐 국가라는 개념이 잘 잡혀있지만, 대부분 지역은 그렇지 않다. 터키처럼 민족이 다양하고 캐나다처럼 언어가 다르며 인도처럼 종교가 다르다. 그렇다 보니, 많은 사상가들이 ‘국가’의 정의를 정립하는 시기가 있었다. 홉스, 로크, 헤겔, 베버 등은 다양한 관점에서 국가(사회)를 제시했는데 그중 미국 건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사상가는 프랑스의 로크다.

‘통치론’에서 로크는 국가를 ‘국민의 재산을 지킬 의무’가 있는 존재로 정의한다. 국민의 재산을 지킬 의무가 있는 존재가 국가라면,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왕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왕권신수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논리다. 국민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으니, 국가는 그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 존재 이유가 사라지니 국민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국가에 ‘저항’할 권리가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국이 총기를 규제하지 못하는 이유로 정치이론가들은 로크의 ‘저항권’을 제시한다.)

당시 자연의 것은 신의 소유며, 왕의 재산이었다.(현재 영국은 아직 이 논리를 유지하고 있다. 영국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는 여왕 소유다.) 신의 소유이며, 왕의 재산인 자연의 것을 단순히 개인이 ‘빌리’는 것에 불과했다. 그 자체가 나의 것이 아니니, 사유재산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로크는 ‘사유재산’을 설명하기 위해 노동의 가치를 인정한다. 자연물에 내 노동력을 첨가하면 나의 소유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처음에 농작물 등에 한정했겠지만, 조금씩 그 범위가 넓어지면서 공산품, 공장, 결국에는 기업까지 ‘사유재산’의 범위가 확장된 것이다.

미국의 경제가 세계대전과 국토개발 등을 발판으로 유례없는 성장을 기록하면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자본주의의 거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JP 모건, 헨리 포드, 앤드류 카네기가 바로 그들이다.

국가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국민들의 재산을 지킨다. 이것이 미국의 논리다. 즉,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그들의 기업도 결국은 살아남는다.** 미국 이민자들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살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소돔과 고모라라고 칭했던 유럽의 옛 것(자신의 이름)이 아닌 다른 곳에 자신의 정체성을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국가의 비호 아래 자신의 이름을 새길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비석, 주식시장에 이름을 남겼다.

이는 상당히 큰 의미를 지닌다. 앞서 이야기한 공식석상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상황을 예시로 들어보자. 한국인이라면 “제 이름은 홍길동이고, 삼성전자에서 시니어 엔지니어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소개하는 게 일반적인 것처럼 미국에서는 “저는 제이콥이고 JP모건에서 채권 트레이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소개할 것이다. 즉, 한 사람의 인생에 이름(Jacob) 다음으로 중요한 부분(J.P Morgan)을 모건은 자신의 이름으로 채운 것이다. 우리는 J.P Morgan에서 채권 트레이더일을 하고 있는 제이콥을 부러워할 것이고 제이콥은 자신이 J.P Morgan에서 트레이더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경영학에서 회사와 같은 조직을 하나의 유기체로 대입하여 설명한다. 각 부서가 자신의 위치에서 일을 하는 것이 마치 각자 역할을 하는 장기들이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인사팀은 조직의 뼈대를 세운다는 점에서 인체의 뼈와 비슷하고, 총무팀은 인체에서 피와 같은 돈을 관리한다는 관점에서 심장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연구팀은 무언가를 만드는 손, 영업팀은 발의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제이콥은? 제이콥은 수백만 달러를 우습게 버는 채권 트레이더일을 하고 있지만, 결국 J.P Morgan의 손가락 하나 정도일 것이다. 삼성에 다니는 홍길동 씨는 이병철 혹은 이재용의 손가락이라는 느낌이 안 드는데 말이다.

결국 J.P Morgan이라는 이름으로 세운 회사는 제이콥에게 자부심을 주었지만, 반대로 제이콥이 JP Morgan이라는 실재했던 사람의 일부분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게 만든다. 이게 실재한 사람의 이름으로 지어진 회사들이 갖는 무서움이다. 결국 J.P Morgan은 상장을 했기 때문에 존 피어몬트 모건의 회사는 아니다. 나도 당신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약간의 돈만 있다면 J.P Morgan의 주주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존 피어몬트 모건은 죽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의 인체는 사라졌지만, 그가 추구하는 철학, 업, 이름은 남을 것이다. 그것도 오랫동안. 왜? 대마는 죽지 않으니까.


* 사실 카네기, 모건과 같은 사람들이 All-Time 부자인 이유는 그들이 주식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창업주가 10%의 지분을 갖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인데, 그때는 반대의 경우가 흔했다. 현재 이들 기업은 모두 주식 시장에 상장되어 있지만, 그때는 상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 주식 시장이 미국이 이끄는 ‘자본주의’의 상징과 같은 의미기 때문에 사용했다. Ford는 1956년 상장, Goldmansachs 1999년 상장, CarnegieSteel 상장 정보 없음(1901년 해체, 후신 US스틸 )


** 회사는 유기체처럼 사라진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산업을 영위하고 있는지 보시라. 금융업, 철강, 석유, 철도(철도왕 벤더빌트는 학교에 이름을 남겼다. 카네기도 카네기 멜론 대학교라는 멋진 학교에 이름을 남겼다.)는 무조건적으로 시장을 먼저 차지한 기업이 유리하다. 그들이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의 총아인 금융업은 자본주의의 몰락 혹은 금융 생태계가 체질 변화를 맞게 되면 그 위협을 받을 수 있다. 철강은 제련되는 철강들보다 좋은 Commodity가 개발된다면 고로들은 쓸모가 없어진다. 하지만 이미 고도로 발전된 지금에서 그것들이 쉽게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 많지 않은 사람들조차 JP Morgan의 Senior자리를 탐내고 있을 테니.


*** J.P Morgan 같은 투자은행에서 채권 트레이더로 일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연봉을 수령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여의도에서도 채권 트레이더는 연봉이 10억이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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