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우연히 ‘알쓸신잡’에 출연했던 건축가 유현준의 비디오 클립을 접했다. 유현준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나 ‘어디서 살 것인가’와 같은 책은 내게 건축이라는 새로운 흥미를 줬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라는 일반인에겐 생소한 건축가가 내게 익숙한 이유도 이 책들 덕분이다.
그 유현준 건축가가 수학한 곳이 바로 미국이다. 그래서 책에서 제시하는 예시와 비교는 대부분 미국이다. 유현준 작가는 동영상에서 ‘벤치’의 개수를 통해 사회를 본다고 했다. 그가 정의하는 벤치는 ‘길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편히 앉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벤치는 어떤 장벽도 없다. 사람만 없다면, 그곳에 앉아있는데 눈치를 볼 필요도, 돈을 내야 할 이유도 없다. 모두가 편히 앉아서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그가 말하길, 뉴욕 맨해튼 거리에는 벤치가 170개, 같은 거리의 서울 가로수길에는 벤치가 딱 3개 존재한다고 한다. 맨해튼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고 가로수길은 벤치가 턱없이 부족했다. 작가는 이게 한 사회를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말을 한다. 돈이 많던, 적던 뉴요커들은 벤치에 앉아 쉴 수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쉬기 위해서는 카페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돈이 많으면 스타벅스, 적으면 백 다방(혹은 이디야)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는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다. 유현준 작가는 항상 자신의 저서에서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좋은 공간이 ‘방’이라고 한다. 개인 혹은 소수가 독립된 공간에서 무언가를 즐기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다. 게임을 즐기러 노래를 부르러 PC방, 노래방에 가고 공부를 하러 독서실에 들어간다. 이렇게 개인의 사생활을 보장하는 사회는 자신의 영역 안에 없는 사람과 부딪칠 수 없는 구조다.
그가 든 예시인 스타벅스와 빽다방은 부의 격차 이야기가 아니다. 유현준 작가가 이야기하는 바는, 결국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타벅스에는 스타벅스를 주로 가는 사람들이, 빽다방에는 빽다방을 주로 가는 사람들이 모인다. PC방에는? 노래방에는? 모두 마찬가지다.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반대로 자신과 연관 없는 사람들과는 대화를 하지 않는다. 대화할 기회조차 없다. 왜? 주위에 없으니까.
‘주위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기 쉬운 구조임을 뜻한다.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내 주위엔 그런 사람 한 명도 없는데?”라는 마법의 한 마디가 모든 논의를 종결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는 공식 성상에서나 나와 다른 사람과 대면하니, 사회의 골을 깊게 만든다. 공식 석상에서는 정제된 단어(딱딱하고 냉정한 단어)를 사용하고 물러서기 어려운 조건이니 말이다. 만약 그 두 집단이 모임이나 술자리 같은 격의 없는 자리에서 대화를 나눴다면, 그 갈등이 이리 심각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식 석상은 한쪽만 바라보는 정치, 뉴스, 토론 따위를 일컫는다.
이것이 유현준 작가가 한국 사회를 ‘공간적’으로 꿰뚫고 있는 바다. 전에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렇게 새롭지 않아야 했지만, 굉장히 색달랐다. 전에는 나와 작가 사이에 ‘책’이라는 가교가 얼기설기 얽혀있었지만, 구멍이 송송 나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딱 와 닿지 않았다. 무언가가 부족했다. 바로 경험. 미국에 가 본 적이 없는 내게, 다른 나라에서 살아 본 적 없는 내게 한국 이외의 사회는 소설 속에나 나오는 상상의 도시, 나라, 사회였다.
미국에 가본 적이 없는 나는 미국을 매체로 접했다. 뉴스를 통해 접했고 할리우드 코드를 읽었으며, 미국에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내게 미국은 ‘분열된 제국’이었다. 내가 들은 미국은 부유층이 사는 지역과 빈곤층이 사는 지역이 달랐다. 같은 도시에 사는 데도 말이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비슷한 사람들과 교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항상 텍사스는 Red State였고 캘리포니아는 Blue State라는 사실이 그것을 방증했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도시다. 캘리포니아, 워싱턴 주 등 서부 해안 지역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아시안들이 거주하고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 멕시코 등에는 히스패닉이 많이 거주한다. 그리고 북서부 지역인 일리노이, 미시간, 오하이오 등에는 북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거주한다. 같은 나라지만,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다. 당연히 인종차별 등의 갈등이 존재하고 그것들을 매체는 앞다투어 보도했다. 이런 소식만을 접한 내게 미국은 절대 ‘화합의 나라’는 아니었다.
다들 사실이다. 내가 연수를 했던 캘리포니아는 ‘트럼프’를 혐오하는 수준이었고 필라델피아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투표가 우리의 권리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푯말을 집집마다 붙이고 있었다.(내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필라델피아의 흑인 밀집 거주 지역이다.) 그리고 부유층이 사는 지역, 빈곤층이 사는 지역은 확실히 구분되어 있다. 같은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분위기에다, 사람들도 굉장히 다르다.
그럼에도 미국은 내가 들은 미국과는 굉장히 달랐다. 분열됐지만, 한국의 정과는 다른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다. 한국의 정이 오래될수록 깊은 맛을 내는 된장과 같다면, 미국은 쉽게 말을 붙이고 쿨하게 떠나는 포스트잇 같았다. 나는 그것을 ‘축제’에서 봤다.
내가 다녀 본 한국의 축제는 대개 수동적이다. 어디든 비슷한 포맷이다. 각 지역의 특산품을 판매하는 시장 코너, 푸드 트럭이나 포장마차가 운집한 요식 코너, 아이들의 흥미를 북돋우는 놀이기구 코너, 그리고 무대가 있다. 무대에 서는 이들은 그 행사의 규모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데 작은 규모면 인근 중고등학교 댄스부 등이 올라서며, 큰 규모의 행사는 모객을 위해서 아이돌 혹은 인기 가수를 섭외한다.
이런 축제에서 나 같은 소시민이 즐길 수 있는 것들은 한정되어 있다. 시장에서 장을 보고 푸드 트럭에서 음식을 먹고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즐기는 것이다. 시간이 나면 푸드트럭에서 산 음식을 가지고 무대를 본다.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대전에서도 이 패턴은 똑같다.
미국은 달랐다. 나는 우연찮게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Downtown LA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석했다. 댄스 페스티벌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주는 살사였고 다음 주는 KPOP이었다. 미국에 생전 처음으로 온 것이기 때문에 지글거리는 햇빛도, 청량한 야자수도 모두 새로워 설레는 마음으로 댄스 페스티벌에 갔다. 가벼운 마음으로 갔는데 문화충격을 받았다. 어림 잡아도 3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작은 공원에 모여 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라라 랜드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무대가 있었지만, 무대는 시민들에게 동작을 알려주기 위한 보조 역할에 불과했다. 페스티벌에 참여한 시민들은 무대가 아니라 파트너와 자신의 춤을 즐기고 있었다. 조그맣게 푸드트럭도 준비돼 있었지만, 정말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 존재할 뿐 먹기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처음 본 사람에게 몸을 맡기며 여러 사람과 자연스럽게 교류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게 유현준 작가가 ‘벤치’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 ‘자유롭게 쉬면서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인간은 겉으로 보기엔 꽤 단순하다. 같은 위치에 눈이 있고 역시나 비슷한 위치에 코가 있다. 이 모든 것이 같은 기능을 한다. 눈은 보고 귀는 듣는다. 생김새도 멀리서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가끔 나는 모두 나와 ‘비슷한’ 세상을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정말 다르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한다. 반대로 다른 것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한다. 예를 들면, 사람마다 ‘사과’하면 떠오르는 게 다를 것이다. 과학자는 뉴턴의 사과가, 기독교도에겐 아담의 선악과(Adam's apple)가, 당신은 지금 쥐고 있는 디바이스의 제조사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유현준 작가는 ‘벤치’에서, 나는 ‘축제’에서 같은 것을 떠올렸듯이, 사람들은 겉보기와 다르게 굉장히 다르다. 사고방식도 다르고 배경도 다르다.
내가 책을 많이 읽었을 적, 책으로 세상을 보다 보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책에선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만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박진감이 넘치지만, 세상은 따분하다 보니 경험보단 책이 주는 ‘착각’ 속에 매몰되고 말았다. 그러다 절대 책이나 활자로는 알 수 없는, 극복할 수 없는 벽을 만났었다. 간접 경험이 아니라 내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때 나는 ‘못 먹어도 고’라는 심정으로 도전했지만, 어수룩했던 나는 무참히 실패했다. 처음으로 경험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책은 내가 선택한다. 하지만 경험은 내가 선택하지 않는다. 그 차이가 책과 경험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그제야 세상에는 다양한 잣대와 가치관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1,31)이 z 축을 만났을 때
그러면서 그 바운더리를 조금씩 넓혀갔다. 유럽에서는 백지상태였지만, 사진으로 상대를 이해했고 영상으로 나 자신을 알아갔다. 그들의 역사로 문화를 엿보고 예술로 그들의 시대를 탐닉할 수 있었다. 여행은 내가 경험을 하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가장 극단적으로 경험을 주입하는 극약처방이기도 하다. 짠돌이인 내게 여행에 투자하는 돈은 절대 작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효용을 위해서 무언가를 알아가려고 몸에 맞지도 않는 것들을 억지로 쑤셔 넣어본다. 가끔 실패를 하기도 하지만, 나름 성공적으로 안착한 것들도 몇몇 있다.
삶은 레이어를 찾는 과정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 레이어를 끼워 세상을 바라본다. 과학 레이어를 끼면 사과에서 뉴턴을, 종교 레이어를 끼면 사과에서 아담을 떠올린다. 예술 레이어를 끼면? 현대 회화의 효시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세잔의 정물화가 강조되어 보일 것이다.
세상은 절대 몇 가지 색으로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한 사람이 모든 색을 가질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관용’이다. 미술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스푸마토’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드러난 스푸마토 기법은 경계를 모호하게 표현하면서 오묘한 표정을, 회화에게 역동성을 부여했다. 모나리자가 전 지구적인 사랑을 받는 이유도 바로 ‘스푸마토’ 때문이다. 그 ‘스푸마토’와 대척점에 서는 것이 바로 ‘후기 인상주의’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전폭적인 사랑을 받는 빈센트 반 고흐가 ‘후기 인상파’의 좌장 격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경계를 선으로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특징이다. 색도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등 화려하지만 단조롭다. 어쩜 한국에게 딱 맞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유현준의 벤치는 내게 축제고 후기 인상주의다. 같은 눈을 가졌음에도, 어찌 이렇게 보는 관점이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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