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회화 모음집: 국가 편

박물관 테마파크, 워싱턴 D.C (5)

by GOYA

- National Gallery of Arts.


미국에 있으면서 각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그 도시를 대표하는 미술관 한 곳은 방문해보는 편이다. 시카고에서는 시카고 미술관을, 뉴욕에서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SFMoMA를 가는 건 이제 내 여행 일정에서 당연한 일이다. 워싱턴 DC에서는 이미 국립 여성 예술가 박물관을 다녀왔지만, 워싱턴의 대표 미술관인 내셔널 갤러리를 빼놓을 수는 없었다.


Screenshot_20200209-121413_Drive.jpg 무엇이 특이한가요?

각 도시의 전시작품들이 그 미술관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가령,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단순히 서양 회화, 미국 문화재뿐만 아니라 이집트 신전, 오세아니아의 토템 등을 전시하고 있는 지극히 Imperialism적인 박물관이다. 시카고 미술관은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이나 쇠라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와 같은 인상주의 중에서도 차분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차분한 느낌의 전시를 즐길 수 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미국의 역사적 가치를 담고 있었다.


20191103_140021.jpg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관들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는 ‘서양 회화 모음집: 국가 편’이 적절할 것이다.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는 다른 미술관과는 다른 독특한 전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미술관들은 미술품들을 시대별로 전시를 한다. 비잔티움 미술(중세), 르네상스 미술, 바로크, 로코코, 낭만주의...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는 ‘국가’ 별로 전시를 구성했다.

사실 국가로 구성해도 시대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중세 미술은 대부분 비잔티움(동로마) 작품들인 경우가 많고,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바로크는 플랑드르, 로코코부터는 프랑스 작품인 경우가 많다. 르네상스의 플랑드르 화가 얀 반 에이크, 스페인 낭만파의 거장 프란치스코 고야 같은 예외도 있지만 그 흐름은 국가 단위로 이어지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f9f70f5a9e89674144154d237170cbf2_350__2.jpg 산 속에 숨겨진 절

공간은 기승전결을 뚜렷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편의’를 위해 절정과 결말만을 취한다. 산속에 있는 절을 중턱까지 차를 타고 올라가 편리하게 방문하는 것과 초입부터 산속을 헤매 당도하는 것이 주는 경험은 극명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 내가 ‘검은 연작’을 보기 위해 한국에서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까지 가는 그 일련의 과정이 내게 더 큰 ‘감동’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미술관은 이 오묘한 경험을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한다. 경험의 일관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를 거닐며, 몽마르트르 언덕을 오르고 만나는 인상파의 작품과 뉴욕 한복판에서 일로 지친 뉴요커가 만나는 인상파의 작품은 같을 수 없다.

내셔널 갤러리도 이 한계를 극복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국가라는 ‘공간’에 초점을 맞춘 전시 덕에 나름의 맛이 있었다. 국적은 작가에게, 작품에게 꽤 큰 정체성을 부여한다.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작품에 배와 바다가 많이 보이는 것도, 같은 시대의 독일 화가 카스피르 프리드리히의 작품에는 숲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다 그들의 ‘국가’가 주는 경험 때문이다. 같은 시대임에도 이들은 다른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다. 작품을 시대로 구분하는 다른 미술관에선 그들의 작품을 연속적으로 감상하기 때문에 이 차이를 놓칠 수 있지만, 국가로 구분하는 내셔널 갤러리에선 그 차이가 명확히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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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화가 프리드리히(독일)와 터너(영국)의 작품


워싱턴 D.C는 전 세계 외교관들이 모이는 미국의 수도라는 점을 미뤄볼 때, 아마도 이런 전시 구조는 외교적 장치로 활용될 것이다. 각 국가에서 오는 사절단들에게 콤팩트하게 그들의 문화를 우리가 존중하고 즐기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공간으로 미술관만 한 것이 없다. 시대별로 구분하면 프랑스 사절단에게 스페인 작품을 소개해야 하는 경우도 생기니 아예 전시관을 분리한 것이다. 어른들의 이유라지만, 아무튼 그 덕에 ‘시대’가 아닌 ‘국가’의 관점으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다른 여타 미술관에서는 해보지 못한 색다른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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