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한 달 살기’를 꿈꾼다. 인연을 찾기 위해 ‘냉정과 열정 사이’에 있는 피렌체로 떠나는 이, 별을 헤느라 밤을 지새워야 하는 파리, 베이글을 한 입 물고 지하철로 출근하는 모습조차 낭만적인 뉴욕... 행선지는 다양하다. 다들 그렇게 한 달 살이를 꿈꾼다.
삶과 여행은 무엇이 다를까? 내가 본 ‘한 달 살기’를 하는 사람들의 영상은 특별하지 않았다. 컴퓨터 한 대만 있어도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영감을 얻고자 다른 도시에서 일을 하면서 저녁이나 주말 등 여유 시간을 이용해 ‘여행’을 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즐겼고 시간이 남으면 근교로 떠났다. 결국 매체 속 그들의 모습은 여행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맛집을 찾아갔고 미술품들을 감상했으며 아름다운 도심 속 거리를 거닐었다.
매체의 차이였을까. 블로그나 브런치 등 짤막한 글들은 ‘살이’의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집에서 한가로이 짜파구리를 해 먹는 모습, 넷플릭스를 보는 모습, 가볍게 집 앞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여유롭게 즐기는 모습 등 다양한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장소가 다른 곳이었을 뿐, 모습은 한국에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날이 늘어가는 요리실력 우리의 일상은 생각보다 평범하다. 동영상은 특별함을 잡기는 좋지만, 평범함을 서술하기엔 애로사항이 많다. 맛집을 찾아가는 날도 있지만, 대부분의 날은 집에서 밥을 해 먹는다. 미술관을 찾아가기도 하지만, 방구석에 앉아 넷플릭스를 보는 시간이 더더욱 많다. 아무리 V-log를 찍는다고 해도, 대자연의 상태로 넷플릭스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없다. 설거지거리를 최소화하기 위해 한 그릇에 꾹꾹 눌러 담은 반찬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없다. 그렇다 보니, 동영상이나 블로그에 나오는 ‘한 달 살기’의 모습도 결국 여행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타지에서 ‘1년 살이’를 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와 필라델피아라는 대도시에서 1년 가까이 보내고 있음에도 한국보다 적은 인간관계 덕분에 굉장히 나른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하루하루가 청량하다. 가끔 파란 속살을 보이는 하늘과 삭막하기 그지없는 동네가 주는 미묘한 불협화음이 나를 싱그럽게 만든다.
삶과 여행의 차이를 묻는다면, 나는 이 여유에서 찾고 싶다. 이 여유는 동영상에 담을 수 없다. 여유는 특별하지 않다.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를 더 적극적으로 즐길 수 있고 좋아하지 않는 것도 도전해 볼 수 있다. 다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보다 로스앤젤레스, 필라델피아 집값이 비싼 이유는 간단하다. 할 게 많다. 우리에게 여행지로는 익숙지 않은 필라델피아조차 서울보다 즐길거리가 많다. 필라델피아 필리스, 76 ers, 이글스, 플라이어스 등 미국의 메이저 4대 스포츠 팀을 가지고 있으며, 클리블랜드, 시카고, 뉴욕, 보스턴과 함께 빅 파이브의 일원인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라는 뛰어난 오케스트라도 상주해 공연을 펼친다. 그들이 공연을 여는 버라이즌 홀의 규모도 상당하다. 뿐만 아니라, 전미투어를 하는 서커스, 공연, 뮤지컬, 오페라 등 사실상 모든 것들을 앉은자리에서 즐길 수 있다. 필라델피아에선 이것들이 ‘당연’하지만, 서울에선 어느 것도 당연하지 않다.
아직 야구시즌이 아니라 필리스 사진이 없어요.. 여행객 권용민이라면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경기보다는 보다 친숙한 LA 다저스의 경기나 토론토 블루제이스, 뉴욕 양키스의 경기를 보았을 테고 오케스트라 공연을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은 가장 자유로워 보이지만, 사실 모든 일정을 ‘계획’하는 활동이다. 계획이란 절차를 거치는 이상, 여행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내가 알고 있는 것,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을 알음알음해서 여행을 한다. 시간적 한계와 넘치는 일정으로 여행객들은 경제적이지 못한 선택을 종종 하게 된다.
내가 주민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나에겐 충분히 긴 야구 시즌이 있고 성공적인 뮤지컬은 나의 앞마당인 버라이즌 홀에서도 공연을 갖는다. 내 일정에 맞는 공연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공연을 볼 수 있다. 내가 좋아하지 않아도 즐겨볼 수 있다. 시간이 많으니까.
게다가 우리가 주로 선택하는 ‘한 달 살이’의 도시는 대개 주민들에게 굉장히 관대하다. 많은 문화 콘텐츠들이 있고 이방인이 익숙하다. 더 오랜 시간 머무르지만, 더 저렴하고 풍성하게 도시를 즐길 수 있다.
나의 경우, 한 달 생활비가 100만 원이다.* 그중 $580은 집값과 유틸리티 비용이니, 사실상 $300 정도로 한 달을 생활한다. 그중 250달러 정도를 식자재에 사용하니, $50이 내 여가비다.
너무 적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사실 $50는 절대 큰돈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술자리 한 번 가지면 6만 원은 쉽게 깨지니까. 하지만 내가 사는 필라델피아에서는 $50로 꽤 많은 것을 즐길 수 있다. 토론토가 방문하는 날에 맞춰 야구 티켓을 2장 사뒀고 필라델피아 76 ers와 Knicks의 농구 경기도 볼 예정이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1달에 한 번은 꼭 방문하는 월례행사가 되었고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는 주례 행사다. 이 모든 걸 $50에 즐길 수 있다.** 한국에서 만약 메이저리그 경기를 관람하고 NBA 경기를 보고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 티켓을 사야 한다면, 나의 생활비 반 이상이 날아갈 것이다.
난 여기서 이 일을 한다. 차이는 기회다. 여유가 주는 기회. 나도 과거 여행할 때마다 많은 갈등을 겪었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최대 효용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달력이란 바둑판에 일정이란 퍼즐을 맞췄다. 매주 토요일에만 열리는 의식행사, 겨울에는 뜨지 않는 열기구 등 가늠하기 어려운 가능성을 따라 위태롭게 일정을 직조했다. 그렇게 잘 계획된 일정을 따라가다 보면 피곤한 나 자신이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또한, 매일 주는 새로운 경험이 그 광경이 주는 감동을 반감시켰다.
삶은 다르다.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고 남은 여운을 곱씹어 볼 충분한 여유가 있다. 오늘이 아닌 내일이어도 된다. 다음 주여도 큰 문제없다. 그 사이는 넷플릭스로 하루를 채울 수도 있고 이렇게 글을 쓰는 시간으로 보낼 수도 있다.
나는 젊은 날에 많은 경험을 쌓는 것이 인생을 길게 보는 데 있어서 무조건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앞만 보고 가다가는 놓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나에게 스페인 여행이 없었다면 미국에서 미술관을 가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미술관 없는 여행을 상상하기 힘든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제련이다. 경험은 제련되지 않은 원석과 같다. 원석은 그 자체로는 빛이 나지 않는다. 잘 제련해야 명품이 되고 보석이 된다. 제련의 방법은 다양하다. 나는 브런치에 글을 쓰지만, 영상을 찍는다거나 일기를 쓰는 것도 다 각자의 제련 방법이다. 차이만 있을 뿐, 우열은 없다.
여행을 끝내고 항상 일지를 썼다. 인상적이었던 것이나,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글로 담담히 적었다. 그럼에도 못내 아쉬웠던 건 시점이다. 글을 쓰고 있는 시점과 경험이 이어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이스탄불에서의 기억을 적으면 또렷한 기억임에도 잘 담아내지 못했다. 카흐베가 아닌 아메리카노를 곁에 두고 이스탄불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살이’는 다르다. 여유가 있다. 경험들을 충분히 어루만질 수 있는 여유, 다음 스텝을 준비하기 위한 여유... 이것이 여행과 삶이 다른 이유다.
* 필라델피아 밖으로 나가는 여행비는 제외했다.
** 가격이 중요하지는 않지만,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비용을 밝힌다.
필라델피아 필리스 VS 토론토 블루제이스 $11
필라델피아 76 ers VS 뉴욕 닉스 <$20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멤버십 가입 시 무료 (가입비 $25)
필라델피아 미술관 Donation 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