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스가 에이스로 은퇴하는 법
야구의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투수에 맞춰져 있다. 상대 선발 투수가 좌투인지, 우투인지, 속구 비율은 얼마나 되는지, 어떤 변화구를 구사하는지 보고 상대팀 감독은 스타팅 라인업을 결정한다. 우완 선발이 등판하면 좌타자가, 좌완 선발이 등판하면 우타자가 선발 라인업으로 나서는 식이다. 이처럼 선발 투수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느냐가 그 경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럼에도 투수 유망주가 갖고 싶은 능력은 단 하나다.
“100마일을 던지고 싶어요.”
아직 프로 데뷔를 하지 않은 고교 투수 유망주에게 무엇을 가지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백이면 백 구속을 이야기한다. 워낙 100 Mile(약 161km/h)을 쉽게 던지는 유망주가 많은 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 100 마일을 던지는 투수는 굉장히 희귀하기 때문에 이들이 드래프트를 신청하면 많은 계약금을 받고 1라운드에서 지명된다. 대표적인 한국의 파이어볼러 키움 히어로즈의 안우진, 조상우, 장재영 모두 1라운드(2차), 1차 드래프티 출신이다. 노력으로 향상되는 제구와는 달리, 구속은 정해진 포텐셜이 있어 크게 줄지도, 늘지도 않는다. 투수 유망주의 잠재력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뚜렷한 지표기 때문에 100 mile을 던지는 유망주는 구단에게,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희귀 매물이다.
100마일이 흔한 메이저리그에서도 제구가 되는 강속구 투수는 여타 다른 투수보다 시장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악의 제국’ 뉴욕 양키스의 에이스인 게릿 콜, 뉴욕 메츠를 넘어 메이저리그 최고의 우완이라고 일컬어지는 제이콥 디그롬 모두 160km/h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속구를 지니고 있다. 시대를 호령했던 클레이튼 커쇼, 맥스 슈어져, 저스틴 벌렌더도 150km/h를 상회하는 수준급의 속구를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모두 명예의 전당 헌액이 예정된 혹은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이다. 이처럼 구속은 수준급 타자를 요리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에이스라는 호칭에 걸맞은 지표이기도 하다.
수많은 유망주, 빅마켓 구단, 팬들의 사랑을 받는 100마일이지만, 모든 이에게 허락된 것은 아니다. 설사 지금 당장 100마일을 던지는 투수라도 그것을 영영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파이어볼러’ 이미지를 각인시킨 뉴욕 양키스의 클로저, 아롤디스 채프먼도 평균 구속 100 mile 밑으로 내려온 지 오래다. 이 수치도 굉장히 대단한 것이나, 구속은 투수의 투구 수가 많아질수록, 투수가 늙어갈수록 서서히 감소한다. 이때 투수는 결정해야 한다. 속구를 꼭 움켜쥐고 동반 하락할 것이냐, 새로운 모멘텀을 받을 것이냐.
100마일은 투수를 평가하는데 가장 직관적이고 매력적인 수치임은 분명하지만, 가장 예민한 스포츠라고 볼 수 있는 야구를 대변하는 숫자는 아니다. 이들의 반대편에는 팔색조라 일컬어지는 또 다른 유형의 투수가 있다. 90마일도 안 되는 패스트볼로 타자들을 요리한다. 이들은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에 공을 찔러 넣으며, 허를 찌르는 볼배합으로 타자들의 타이밍을 뺏는다. 대표적으로 류현진이 있다.
강속구로 좋은 성적을 올린 리그 에이스급 선수들은 구속 하락이 있을 때 즈음 팔색조로 변화를 모색한다. 이전에도 결정구로 사용하던 변화구의 빈도를 높이고 타이밍을 뺏는 혹은 궤도를 달리 하는 변화구를 연마한다. 이전에는 이런 변화가 쉽지만은 않았지만, 여러 세이버 스탯의 발달, 드라이브 라인 등에서 여러 최신 과학기술을 접목한 훈련 방식을 도입하면서 에이스급 선수들은 보다 쉽게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표적으로, 클레이튼 커쇼와 잭 그레인키가 있다.
이들은 성공했지만, 이들이 성공했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구단들이 클레이튼 커쇼를 바라고 과감하게 1라운드에서 뽑은 고교 투수 유망주는 다른 선택지(대졸 투수, 고졸 타자, 대졸 타자)에 비해 성공확률이 21.3%로 가장 낮았다.*(WAR 10 이상 선수) 이처럼 클레이튼 커쇼 그리고 같은 고교 출신 잭 그레인키만 체질 변화에 성공했을 뿐이다. 그 아래에는 수많은 강속구 투수들이 자신이 가진 장점을 잃고 후배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줬고 팬들에게 잊혔다.
*출처 : 인사이드 게임, 키스로
스물의 당찬 고교 에이스는 강속구를 바란다. 같은 성적을 내는 투수라도, 강속구로 삼진을 잡을 수 있는 선수의 값이 더 높다. 실제로 2020 시즌을 앞두고 같이 사이영 컨텐더 시즌을 보낸 류현진은 4년 8000만 달러를, 게릿 콜은 9년 3억 2400만 달러 계약을 맺었다.(NL 사이영 2위: 류현진, AL 사이영 2위: 게릿 콜) 나이를 고려해도 계약 규모나 보장 연도에서 큰 차이가 난다. 스물의 고교 에이스는 훗날 있을 FA 계약에서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리려면, 무엇보다도 구속을 가져야 한다. 같은 실력이라도 빠른 구속을 갖는 편이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갖는다.
갓 FA를 맺은 서른의 팀 에이스에게 더 이상 성장은 없다. 고난만이 기다리고 있다. 어마어마한 보장 금액과 계약 기간은 팬들이 자신을 욕하는 이유가 되며,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다. 팀 내 고참이 된 에이스가 조언을 구할 곳이라고는 없다. 구속이 빨라지길 바라는 건, 디그롬에게나 가능한 말이다. 서른에 바꿀 수 있는 건 그들의 체질이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만, 에이스급 선수들은 곧잘 해낸다. 어쩌면 팀 에이스와 평범한 투수의 차이는 실력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냐, 대응하냐. 그것이 에이스가 에이스로 은퇴하는 방법이다. 시간이 지나면 내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법칙이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