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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YA Nov 05. 2021

한국과학기술원을 택한 이유

대학원을 택한 이유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하고 난 후, 내 유일한 목표는 한국과학기술원이었다. 국내에서 비슷한 수준이라고 평가되는 서울대학교나 포항공대는 한국과학기술원 입시에서 미끄러졌을 때를 대비한 차선책이었지, 우선순위는 아니었다.


 대학원 입시는 대학 입시와는 조금 다른 특색을 가진다. 우선 서열 나누기를 좋아하는 대한민국답게 이 판에도 서열이 존재한다. 앞서 언급한 서울대학교, 한국과학기술원(KAIST), 포항공대를 뜻하는 설카포(혹은 SKP)라는 그룹이 있다. 이들은 평균적으로 국내 다른 대학원에 비해 높은 성과를 낸다. NCS(Nature, Cell, Science)이라고 불리는 최고 수준의 과학 저널에 논문을 싣는 랩실도 여럿 있고 세계적인 석학들이 교수로 재임하고 있다. 이런 팩트가 분명히 있지만, 이것은 대학원 전체 ‘평균’ 실적일 뿐이다. 그 안에도 여러 골칫거리들이 있고 대학원생들에게는 ‘괴수’라고 불리는 트러블메이커들도 많이 존재한다.


 이런 불확실성에 비해 대학원 생활은 상당히 길고 자신의 커리어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하기 때문에 설카포가 아닌 대학교에 재학 중인 재원들은 자대(본인이 학부 과정을 마친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석사 같은 경우는 교수님의 역량으로 자신의 포텐셜이 좌지우지될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모르는 대가 교수님 아래서 수학 하는 것보다 잘 아는 자대 교수님 아래에서 지도를 받는 편이 훨씬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게다가 학부 과정부터 연구에 참여해 보다 빨리 성과를 낼 수 있다보니, 미국 유학을 염두에 두고 있는 적지 않은 학생들이 자대를 선택한다.

 이처럼 대학원생의 관점에서 설카포(SKP)는 평균적으로 유의미한 연구 성과를 가지고 있지만, 핀셋으로 하나씩 집어보면 무조건 택해야 할 선택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자대, 서울대, 포항공대가 아닌 한국과학기술원을 바랐다. 그 이유를 설명해보려고 한다.


1. 경제적 문제

 대학 생활 내내 나는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아 생활을 했다. 엄청 큰돈은 아니었지만, 생활비 명목으로 받았던 장학금, 명절 때 받은 용돈 등을 잘 활용하면 돈걱정 없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원생은 다르다. 대학원생은 어쩌면 직장인이 되어야 할 나이다. 친구들은 월급을 받는데 부모님께 용돈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조금은 미안한 일이다. 다행히 공대 대학원 같은 경우는 국내 회사와 같이 산학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때문에 생활비 명목으로 인건비가 나온다. 인건비는 80만 원부터 180만 원까지 연구실의 사정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책정된다. 큰돈은 아니지만, 기숙사랑 식비를 해결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 중요한 건 학비다.

 서울대의 학비는 학기 당 400만 원에 달하고 포항공대도 이와 비슷하다. 이는 인건비 상당 부분을 쏟아부어야 채워지는 수준의 금액이다. 물론, 국내 최고 수준의 대학원이기 때문에 장학제도는 물론이고 기업이 산학장학생으로 학생을 미리 선점하는 경우도 많아 학비 자체가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카이스트 같은 경우는 대학원에 합격하는 모든 학생들이 장학생이다. 출연 재원이 어디냐에 따라 국가장학생, 카이스트 장학생, 산학 장학생 등으로 분류될 뿐이다. 각자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본인이 합격한 국가장학생 같은 경우는 학기당 70만 원 정도만 납부하면 된다. 이로 인해 재정적으로 한결 여유롭게 생활할 수 있다.


2. 실용주의적인 학풍

 대학원은 대학과는 많이 다르다. 예를 들어, 학부로 기계공학과를 졸업한다고 하더라도, 삼성전자나 SK 하이닉스에 취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계가 안 쓰이는 분야가 있겠냐만은, 학사 자체가 그 유연성이 굉장히 넓기 때문에 어디에 두어도 마땅히 자신의 일이 있다. 반면, 대학원생은 적어도 2년이라는 시간을 연구에 몰두한다. 이 기간을 사회에서는 전문영역에서 경력으로 인정을 해주기 마련이다. 이는 자신의 전문성을 키웠다는 관점에서 보면 좋은 경험이라고 볼 수 있지만,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좁히는 꼴이 되기도 한다. 만약 기계공학 대학원에서 자율주행 연구를 했다면, SK 하이닉스나 삼성전자와 같은 반도체 회사는 갈 기회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무리 석사의 연구 분야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자동차를 Application으로 연구한 학생이 완전히 다른 필드로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기계공학은 어느 정도 완숙한 분야 중에 하나다. 그래서 학부에서 배우는 지식과 대학원에서 배우는 지식의 간극이 꽤 심하다. 학부에서는 고전 역학을 주로 배우는 반면, 대학원에서는 신소재, 화학공학, 전자공학, 컴퓨터 공학, 생명공학을 두루 아우르는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비슷하다고 선택했다가 자동차의 파워트레인이 아니라 바이오 유체를 배울 수도 있다. 이는 같은 유체역학에 기반하지만, 연구의 애플리케이션이 상당히 다르다.(따라서 진로도 다르다.)

 이러한 이유로 대학원 분야는 굉장히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나는 Academic 한 연구보다는 Practical 한 연구를 하고 싶었다. 이는 내 진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하나의 기준만으로도 많은 선택지가 사라졌다. 포항공대는 Nano, Bio에 기계공학을 접목시킨 연구를 주로 하고 있었고 서울대는 갈만한 랩실이 없었다. 반면, 한국과학기술원은 바로 시장에 내놔도 팔릴만한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실이 상당히 많았고 연구실 창업도 흔했다. 이런 분위기는 창업을 바라는 내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3. 국내 최고 수준의 인프라

 대학원을 진학하는 학생들의 목표는 단연코 연구다. 대학은 선배들이 지금까지 일궈놓은 정수들을 배우는 과정이라면, 대학원은 자기 스스로가 그 선배가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의 공부와 대학원의 공부는 같은 듯 많이 다르다. 대학에서 공부는 책만 있으면 된다. 책에 있는 내용들을 충분히 이해하면 대학 과정에서는 높은 성적을 받는 인재가 될 수 있다. 반면, 대학원은 책을 보지 않는다. 책은 매체 특성상 트렌드를 반영하기가 까다롭다. 연구에 기반이 되는 지식들은 책을 발췌해서 보겠지만, 대학원에서 보는 텍스트는 대부분 논문이다. 논문을 통해 그 경향을 잡고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이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면 연구가 되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인프라다.

 여기서 대학원 역량이 가장 극명하게 갈린다. 최근 기계공학 분야에서 핫한 분야인 자율주행을 예로 들어보자. 실제 차량을 가지고 자율주행을 해서 얻은 데이터와 시뮬레이션만을 토대로 얻은 데이터가 있다면, 어떤 데이터가 더 가치가 있을까? 당연히 실제 차량을 통해 얻은 데이터가 더 의미가 있다. 시뮬레이션은 결국 가상 세계고 그 안에는 예측 가능한 변수들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의 베이스가 된 데이터만으로도 그 논문을 개제할 수 있는 저널의 수준이 달라진다. 이는 대학원생의 능력 차이라기보다는 인프라가 주는 한계다.


 그리고 대전이라는 도시가 갖는 인프라도 상당하다. 대전은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과학의 도시다. 국내 최고의 연구진들이 모여 국책 사업을 수행하는 정부 출연 연구기관(정출연) 대부분이 대전에 위치해있다. 한국 과학기술원 교수진도 대한민국 최고 수준이지만, 정출연이라는 또 다른 연구 집단이 있기 때문에 인적 교류도 상당히 많고 협업도 활발하다. 정출연 차원에서 하고 있는 사업들을 보면서, 기술 동향을 살필 수 있고 그 분야 권위자와 면대면으로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이는 산업체가 많이 모여 있는 서울과 정출연이 모여 있는 대전만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혜택이다. 더불어, 이들과 함께 국책사업 등으로 협업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대학원생 입장에서는 굉장히 큰 기회다. 정출연 자체가 대학원생이 원하는 직장 중 하나인데, 그쪽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한다는 것은 거의 산업체 인턴이나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산학 프로젝트와는 달리, 정출연과 함께 하는 국책 연구는 연구 자율성이 상당히 높다. 그리고 지원받는 금액도 어마무시하다. 이런 연구 환경 속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학원생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경험임과 동시에, 인적 자산이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학부까지다. 대학원은 학벌이 되지 못한다. 대학원 간판이 갖는 의미는 ‘평균적으로 높은 연구 성과를 내는 조직 안에 속해 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연구자는 결국 출판물로 승부한다. 컴공이라면 콘퍼런스로 증명하고 다른 공과대는 저널로 증명한다. 필자 자신보다 더 좋은 스펙을 가진 친구도 자대 진학을 택했고 그 친구의 성과는 한국과학기술원 어느 랩실에 두어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런 친구가 자대에 진학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보다 낮은 평가를 받을 이유는 없다. 학계 내에서도 실력만 출중하다면 출신과는 무관하게 인정받는다

(JCR Q1 저자를 도대체 어느 누가 무시하겠는가?)

 필자가 한국과학기술원을 택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내용을 포함한 필자의 상황(고향)이 고려되었을 뿐이다. 인프라가 무조건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처럼 적었지만, 인프라의 도움 없이도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도 많고 인프라가 뛰어나다고 모두 뛰어난 학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모두 각자 나름의, 최선의 선택을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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