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을 빠져나왔다고 방심하지 말자.
나는 발표가 끝날 때 즈음에는 항상 손을 들어 질문을 한다. 질문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일방향 소통인 발표에서 발표자의 생각이나 의도를 단번에 이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궁금했던 부분이나, 어떤 의도에서 이러한 내용을 준비했는지를 묻고는 한다. 그리고 보통은 내 질문은 첫 질문이자, 마무리 질문이 되고는 한다.
나는 정확히 말하면, 세 번째 정도에 질문을 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앞선 두 번의 질문을 통해 내 생각을 다듬을 수 있고 혹여 나와 비슷한 질문을 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굳이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세 번째에 질문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의 경우 내 질문을 하게 된다.
대학원 생활을 하는 중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전히 우리 랩실에서 유이하게 QnA 세션에 참여하는 청자이며, 다른 한 분은 교수님이다. 사실 연구실처럼 각자가 첨예하게 자신의 기술을 개발하는 영역에서는 질문이라는 과정이 꼭 있어야 한다. 청자 입장에서는 좀 더 클리어하게 발표 내용을 이해할 수 있고 화자 입장에서는 다른 이들의 궁금증을 통해 본인이 발견하지 못한 논리의 비약이나 페인 포인트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발표자리에서 질문이 없다는 것은 이 발표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제나 첫 번째 질문을 하던 나는 최근에 신기한 경험을 했다. 나는 이번 학기부터 우리 학교에서 열리는 창업석사 부전공 프로그램에 신청해 관련 과목들을 수강하고 있다. 이 수업을 수강하는 학생들은 기술경영학부 학생들과 공과대학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특이할만한 점은 대부분 ‘이미’ 법인 한 번 쯤 내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교수님이 굳이 누군가를 지목하지 않아도 학생들은 알아서 교수님의 질문에 자신의 생각을 말했고 3rd 질문을 담당하는 내게는 순번이 오지 않았다.
참으로 신기한 상황이었다. 나는 적어도 모두가 낯선 상황에서는 외향적인 성격으로 먼저 말을 걸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이 수업에서는 외려 말 한 마디를 하지 못하는 어벙이가 된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겪어보는 그리고 유쾌한 순간이었다. 맞다, 나는 이제까지 이런 방식의 소통이 올바르다고 생각했음에도 주변에 그런 사람들을 두지 못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자신이 우물 안에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우물 밖 개구리 또한, 자신이 우물 안에서 나왔을 뿐 여전히 울타리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며, 나와 비슷한 사람, 내가 바라는 인간상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딘가에 어떠한 키워드를 바탕으로 모여 있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주변을 보고 낙담을 하거나, 은근한 우월감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인간상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