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베케트의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 」

감상평 및 해석

by 노에시스



프랑스에서만 작품이 출간 되던 1953년에 백만 부가 팔린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뮈엘 베케트의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부조리극(희비극)이라 불리는데, 이 작품을 통해 그 동안 없었던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냈다. 나는 처음에 이 책을 30페이지쯤 읽었을 때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고, 다음 페이지를 넘어갈 때 두 장을 겹쳐 넘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개연성을 찾아 볼 수 없어 상당히 당황했다. 그러나 끝까지 다 읽다 보면 난해한 이 책이 독자에게 던져 주는 물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고민해보아야 하는지 가닥이 어느 정도 잡힌다.


이 책(연극)은 이창동 감독의 <버닝>과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 떠오르게 했다. 이 두 영화의 특징은 감독의 숨은 의도에 개의치 않고 받은 느낌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최종적 물음에 도달해 해석하는데 작품의 의의가 있다. 감독이 의도한 작품의 획일적인 메시지를 찾으려고 개연성을 요목조목 짚어가며 본다면 골머리를 썩기 십상이다. 아마도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 원조 격이 되는 형식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과연 고도가 누구인가?



이 작품은 고도가 누구인지 뿐만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도 생각하도록 한다. 고도를 한 없이 기다리며 나누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대화, 이 둘과 두 차례 걸쳐 만나게 되는 럭키와 푸조, 고도에 대해 소식을 전하는 소년과 두 차례 만남. 여기에 대화 내용과 감정, 행동 등으로 고도가 누구인지 뿐만 아니라, 그 인물들이 어떤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지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한 듯하다.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도를 신, 자유, 죽음으로 대부분 해석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는 신에 대한 생각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언론매체에서 사뮈엘 베케트는 ‘이 작품에서 신을 찾으려 하지 말라’로 말했다. 이 때문에 반기독교적인 사상으로 오인 받기도 하지만 사뮈엘 베케트의 태생은 신교도 가정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이 작품에서도 예수 신앙이 에스트라공의 대사에 담겨 있다는 걸 놓고 볼 때에 반기독교적인 색채와는 거리가 멀지 않을까. 일종의 심리 테스트 같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 내가 현재 어떤 인생의 긴 기다림 속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듯하다.



해석 및 감상평

내 관점(다를 수 있는 생각에 한해,)은 에스트라공은 개인(자의식)을, 블라디미르는 집단(타자성)을 상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가 헤어지자 말하면서도 반갑고, 부둥켜 껴안다가도 어색해 금방 떨어진다. 개인과 집단의 속성은 서로를 당기지만, 동시에 서로를 밀어낸다. 늘 블라디미르(집단)는 에스트라공의 올바른 삶에 대해 지시하고 설득한다. 이건 집단이 가진 사회성의 특성이기도하다. 에스트라공은 푸조(권력이라 생각함,)를 고도로 오해하기도 하며, 푸조가 먹다 남긴 뼈다귀를 핥아 먹으려고 한다(블라디미르는 질책한다.). 개인은 권력의 영향력 앞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어떤 강력한 권력에 휘둘리기 쉽다.). 블라디미르(집단)는 단번에 푸조가 누구인지 안다. 집단의 이성 안에 늘 권력이 내제되어 있기에 쉽게 안 것이다(고 생각한다.).


럭키는 이성, 푸조는 권력이다. 중세 권력은 대게 이성을 통해 세계(국가)를 지배하려 했다. 그들의 첫 등장은 중세시대의 권력과 이성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들어내 주고 있다. 럭키 목에 밧줄로 묶어 노예처럼 푸조(권력)가 끌고 다닌다. 럭키(이성)가 생각하려고 할 때, 주문처럼 외는 대사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기계적이고 판단하고 확인하는 이성의 작용을 흉내 내고 있다. 그리고 하늘나라와 죽음 같은 판단이 중지된 부분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두 번째 등장에서 푸조가 눈이 멀어 등장하는데, 프랑스 혁명은 절대왕정, 절대 권력을 제거했다. 그러나 그 권력이 분산된 것일 뿐, 권력의 눈이 머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는 권력에 눈이 먼 것이다. 럭키(이성)를 지배하려는 의도로 인해, 권력에 눈이 먼 것 뿐 아니라 권력의 무게에도 넘어져 일어서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고도는 ‘알 수 없음(무)’이다. 역사가 맹목적인 추구에는 늘 오류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기에. 맹목적인- 신을 추종, 자유의 갈망, 단정하는 죽음에도 동일하다. 고도의 정체에 대해서 늘 물음으로 존재할 때만 정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최종적인 결과에 대한 기다림은 본인들 몫이다. 누가 어느 인생에 함부로 끼어 들 수 있겠는가.


누구나 겪는 죽음도 한 결 같이 죽음으로만 작동하지 않으며, 개인의 내밀한 삶에서는 다른 의미가 되기도 한다. 아마 신과 자유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각자의 신념과 삶의 현장에 따라서 다양할 수밖에 없다. 기다림의 의미가 절대적인 답으로 주어진 다는 건 세상을 더 적막하게 만들 뿐이다. 서로에게 더 좋은 기다림에 대한 논의와 설득은 허용되겠지만, 인생에 절대적인 건 없기에(절대적인 걸 인간이 완전 익힐 수 없기에), 고도는 ‘알 수 없음(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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