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에 맞서는 참된 '나'

카뮈 「이방인」감상평

by 노에시스




누군가 지금까지 인생에서 최고의 책 한 권을 말해보라 한다면 한결같이 이 책이라 대답할 수 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다. 이 책을 보며 느꼈던 강렬한 그때 그 경험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잊히지 않는다. 주인공 뫼르소을 보며 내 인생에서도 실존적 유사경험들을 떠올리는 동질성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실존이란 철학적인 용어를 이론으로 배우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경험이다. 실존적 속성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타자와의 인간관계 안에 도면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인간관계를 형성하려면 일상이 안녕한지 묻고 일종의 관례적인 의사소통을 먼저 나누어야 한다. 인간은 타인에게 완벽하게 이해되기 어려운 각자 특수성을 지녔기에 평범한 일상의 대화부터 조심스럽게 나누어야 한다. 상승 곡선을 그리는 대화 중 공감대를 이루게 되면 서로가 닮았다 느낀다. 거울을 보는 듯한 나와 완벽한 동일성을 지닌 타자의 인생이란 게 있을까. 그런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대화의 과정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것은 아마도 완성되지 못한 인간 개인의 여정 속에서 동질성 조각들을 타자에게 찾아 조금이라도 인간 실존의 어두운 길을 함께 밝혀 보려는 의지가 아닌가 싶다. 타인에게 던지는 물음들은 타인의 실존 퍼즐을 맞추어 가는 과정 같지만 동시에 나를 찾는 길이기도 했다.



일상 대화 중 누군가가 대화 내용을 일방적으로 규정한다면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다를 수밖에 없는 각자의 특수한 인생의 영역이 획일화되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특히 부부관계나 오랜 친구 사이에 종종 이런 오류가 쉽게 경험되기도 하는 듯하다. 상대를 잘 안다고 타인이 겪은 고유한 일상의 이야기를 단순화시키고 본인 경험 안에서 해석해버리는 경향으로 인해서다. 일상에서 겪은 어떤 감정이나 이야기들은 당사자에게도 쉽게 결론 내기 모호한 성격을 늘 갖고 있다. 따라서 일상의 대화를 한다는 건 문장이나 단어에 감정이나 상황을 인지하고자 표현하려는 의지를 담는 것이지, 말하는 이의 문장과 단어가 의도에 전부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일상은 추상적인 성격을 가졌으며 직관의 영역에 늘 노출되어 있다). 일상의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은 이 대화를 이해하기 위해 일반화시키지만, 그 과정에서 일상의 고유성도 일반화 과정과 함께 매몰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일반화, 개념화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도 하여서 갈등이 있기도 하고 별스럽지 않게 넘어가기도 한다. 일상을 산다는 자체는 완성되지 못한 그 무엇을 매일 목격하고 경험하는 중에 놓여 있기에 그렇다.



카뮈는 소설에서 완성되지 못한 모호한 실존의 속성을 단순화시키고 결론 맺으려는 충동의 상징으로 사법부의 판검사 집단을 등장시킨다. 소설이 쓰인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서 여전히 대한민국의 판검사 적폐와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게 참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카뮈가 ‘나(뫼르소)’ 밖 외부에서 그 상징을 가져왔지만, 소설을 읽는 나로선 인간이 그 실존적 방황을 겪게 만드는 적폐스러운 충동이 우리 안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실존 속에서 겪는 불안은 제도적인 폐단인가. 가정 또는 학교 교육의 폐단인가. 제도적 부조리를 지적하기 앞서서 누구나 내면 안의 나와 만나야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카뮈의 소설이 말하는 대로 인간은 모두가 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이기에, 불안은 누구나 겪어 넘어서야 하는 그 무엇이다.



이 소설은 타자의 세계에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내 존재를 결론 짓고 단순화시키는 작업을 나 스스로가 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게 해준다. 의지가 있다면 얼마든 실존이 가리키는 참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인간 내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체를 상실한 채 세상에 나를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비극이 일어난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타인과 뒤섞여 때론 타인에게 몰입해 살아간다는 건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내면 안의 참된 나를 찾아 떠나는 신비한 여정에 나서게 한다. 그곳에서 만난 '나'의 존재가 바로 부조리의 증인이자, 투사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