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남편을 닮은 솔방울과 산봉우리는 열이 많다. 더운 여름에 잠시만 에어컨을 멈추면 샤워한 것처럼 땀이 나서 밤에도 에어컨을 끄지 못했다. 1~2 주 전부터 날이 조금씩 식어가더니 여름밤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용기를 내어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호된 더위를 피해 여름 늦게서나 울던 매미들은 어디 가고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온다. 귀뚤귀뚤
외출을 삼갔던 이번 여름은 낮이며 밤이며 에어컨만 켜고 있었다. 애써 식혀놓은 집안 공기가 새어나갈까, 찜통 같은 더위가 비집고 들어올까 잠깐 창문을 여는 일도 머뭇거렸다. 해가 잘 들고 앞뒤로 산과 하늘이 훤히 보이는 집에서도 닫힌 창문은 자기 몫을 톡톡히 하며 바깥세상과 나를 단절시켰다. 물 밖 세상을 동경하던 인어공주처럼 창 밖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6주가 흘렀고 아이들과 집에만 있는 생활을 끝내고 등원과 등교를 시작하였다. 개학을 한 솔방울이는 초등학교 1학년의 특권으로 우선은 전면 등교였다. 이후 상황은 모르지만 감사한 마음이다. 당연했던 일상을 누리지 못하며 규칙적인 학교생활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데려다주며 나도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았다.
둘째 아이가 다니는 규모가 큰 어린이집은 변한 것이 없었다. 이미 대부분의 아이들은 한 두 주 전부터 등원 중이었고, 거기에 추가로 우리 둘째 이파리가 등원한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온 나를 보며 아이들은 이파리 엄마라며 반겨주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름의 선택으로 애들을 어린이집에 안 보내며 힘들다고 했던 것이 무색했다. 할 수 있는 부분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나도 이렇게 아이들 보내게 되었다. 바깥세상은 변한 것이 없었다. 모두 각자의 사정 있었고 각자의 마음과 선택이 있었다. 모두가 같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작은 규모의 셋째 산봉우리 어린이집에서는 선생님들과 조금 여유 있게 인사를 하였다. 몇 주간 얼마나 고되셨냐는 말에 마음이 시큰하다. 결국 보내는 엄마의 마음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마음을 전했다. 내 아이들이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이 반이었고, 데리고 있을 사정이 되는 집이 보내지 않아야 보내야 하는 집들이 조금 덜 걱정하며 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투둑 투둑 비가 내리는 1학년 솔방울이의 등굣길은 가슴이 먹먹하다. 1, 2학년만 등교라 우산을 든 등굣길 모습은 올망졸망하다. 이제는 혼자 등교하는 아이들, 아직은 보호자가 데려다주는 아이들이 반반이다. 유리문을 가운데 두고 실내화를 갈아 신는 아이를 지켜보는 보호자들의 얼굴에서는 걱정과 뿌듯함이 함께 보인다. 씩씩하게 또박또박 걸어오는 아이들 사이로 희망이 보인다,
들판이만 카시트에 태워 돌아오는 길, 여유로운 마음이 되어서야 마을 곳곳에 있는 작은 밭들이 보인다. 호박꽃은 잔뜩 커져 농익은 노란색을 뽐내다 고개를 숙였고 고추나무에는 고추들은 가득 달려 새빨갛게 익은 채 구덕 하게 말려지고 있다.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서 마당에서 바싹 말리는 줄 알았는데 어느 정도 말리고 수확하여 그리 말리는 것 같다. 알려준 사람은 없지만 매년 같은 모습을 보니 짐작하는 것이다.
6주 전 아이들이 데리고 집에 있기 시작한 할 때는 싱그러운 보랏빛 가지와 대추알처럼 익어가던 방울토마토와 오이, 키가 큰 옥수수가 자라나던 밭이었다. 수분을 잔뜩 머금고 여름의 열기를 받아 뽐내듯 익어 가던 여름 채소들이었다. 이제는 그 자리를 무성해진 고구마순, 빨갛게 익은 고추, 성큼 자란 깻잎 나무가 차지한다. 아마 저 깻잎 나무는 꽃대를 피워 씨를 맺는 가을에 들깨를 수확할 것이다. 식어가는 바람에 향긋한 들깨 향이 전해 올 것이다.
한풀 꺾인 더위를 이겨낸 매미들은 마지막을 뽐내듯이 울어대고 해가 지고 나면 선선해진 바람 사이로 풀벌레와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온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나서야 그 끝자락에서 여름 풍경이 제대로 보인다. 너무 덥고 뜨거워서 보지 못했던 것이다.
모두가 함께 보낸 코로나라는 뜨겁고 힘든 시간도 거 끝자락에 가면 우리가 지나온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견딘 이 시간이 의미 있고 아름다운 시간이었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