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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책방 Sep 06. 2024

불편함을 마주하라

별, 은하 그리고 우주의 탄생

작렬하는 태양. 내리쬐는 햇빛. 한여름이면 하늘 높은 곳에 떠 있는 해가 참 미워진다. 햇빛을 피하려고 그늘을 찾아다니고, 양산으로 그 눈길을 애써 외면해 보지만 마치 나와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해는 여전히 나를 쫓아온다. 그렇게 해가 밉다가도 어느새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으면 또다시 해가 보고 싶어 진다. 나는 혼자서 태양과 밀고 당기기를 하며 여름을 보낸다.


내 마음이 아무리 흔들려도 태양은 변함없이 우리를 비춘다. 앞으로 약 50억 년 동안 태양은 끝없이 불타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날 태양이 수명을 다해 사라질 때 지구도 함께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구는 태양에 절대적으로 의지한다. 태양의 에너지는 지구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식물은 햇빛을 받아들여 광합성을 하고, 그렇게 자란 식물을 통해 동물들은 에너지를 얻는다. 태양에서 출발한 에너지는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구 구석구석을 채운다. 태양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 사람들이 태양을 신처럼 숭배했던 마음이 문득 이해된다.


태양은 불과 닮았다. 뜨거운 열과 눈부신 빛을 내며 타오른다는 점에서 그렇고, 타기 위해서는 땔감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다만, 태양이 사용하는 땔감은 나무가 아니라 우주의 기본 원소인 수소다. 그리고 태양은 수소를 단순히 태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마치 춤을 추듯 융합시킨다. 이 과정을 '핵융합'이라 부른다.


수소는 양성자 하나를 품고 있는 가장 단순하고도 흔한 원소다. 태양의 핵 속에서 수소 네 개가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한다. 양성자 네 개가 모이면 이중 두 개는 중성자로 변하며 양성자 2개와 중성자 2개를 지닌 헬륨이 태어난다. 그런데 이 순간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아주 작은 질량이 사라진다.


우리는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학교에서 배운 '질량 보존의 법칙'에 따르면, 반응이 일어나도 전체 질량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태양 내부의 핵융합에서는 법칙의 균열이 생긴다. 바로 그 작은 균열이야말로 태양의 비밀이자 별들이 빛나는 이유다.


사라진 질량은 어디로 갔을까? 그것은 그대로 에너지로 변환된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 E=mc²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E는 에너지, m은 질량, 그리고 c는 빛의 속도, 약 30만 km/s이다. 아무리 작아 보이는 질량이라도 빛의 속도의 제곱이 곱해지면 천문학적 크기의 에너지로 변환된다. 그리하여 태양은 작은 질량의 소실을 통해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하며 빛난다. 그것은 마치 핵폭탄이 연쇄적으로 터지는 것 같은 끊임없는 폭발력이다.


태양 같은 항성 그러니까 별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주가 탄생한 그 순간 빅뱅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빅뱅 직후 우주는 한순간에 급격히 팽창했다. 100만 분의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우주는 10⁷⁸배로 커졌다. 상상조차 어려운 이 급팽창은 용광로 같던 우주를 빠르게 식히기 시작했고, 마침내 혼돈 속에 흩어진 입자들이 하나둘 결합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주는 완벽하게 균질하지 않았다. 암흑물질이 일부 지역에 더 많이 모여 있었고 다른 곳은 상대적으로 덜 모여 있었다. 바로 이 작은 불균형이 우주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 미묘한 차이는 중력과 만나 더욱 극적인 불균형을 일으켰다.


질량을 가진 모든 물질은 중력을 발산하며 이 중력은 주위의 물질을 끌어당긴다. 암흑물질이 더 밀집된 지역은 더 강한 중력을 지니게 되었고 소용돌이치듯 주변의 물질을 끌어모았다. 이 소용돌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물질을 흡수하며 질량을 키웠고, 그에 따라 중력도 더욱 강력해졌다. 균열은 점점 커지며 마치 눈덩이가 불어나듯 불안정한 에너지를 쌓아 갔다. 그러다가 질량이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 중심부에서 핵융합이 시작되고, 별은 첫 빛을 내기 시작했다. 별은 바로 이렇게 균열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별은 그 자체로 균열의 산물일 뿐 아니라 그 삶 속에서도 또 다른 균열을 일으킨다. 수십억 년에 걸쳐 핵융합을 지속하며 더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내고, 마침내는 수명을 다해 초신성 폭발로 우주에 새로운 물질을 뿌린다. 태양, 은하, 그리고 은하가 모여 형성된 은하단을 포함한 모든 천체 그들은 모두 초기 우주의 균열에서 시작되었다.


만약 우주가 완벽하게 균등한 상태로 시작되었다면 이 다채로운 우주는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균열은 새로운 것들이 싹트는 틈을 제공한다. 완벽한 평형이 이루어진 순간 우주는 얼어붙듯 멈춰버리고, 마침내 '열죽음'이라는 마지막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높아가는 엔트로피의 흐름에 따라 우주의 종말을 예고하는 이 열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의 화살> 편에서 더 깊이 이야기해 볼 것이다.


별들이 탄생하기 훨씬 전 지금의 우주가 이토록 다양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 또한 아주 사소한 균열 덕분이다. 현재 우리가 아는 모든 원자는 양전하를 가진 양성자와 음전하를 가진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양성자가 음전하를 띠고, 전자가 양전하를 가진 원자도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런 형태의 원자를 우리는 '반물질'이라고 부른다.


반물질의 개념은 1928년 폴 디랙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다. 양전하를 띠는 전자, 즉 양전자의 개념은 당시에는 너무 급진적이어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1932년 칼 앤더슨이 우주선을 연구하던 중 양전자를 직접 관측하면서 폴 디랙의 반물질 이론은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제야 우리는 우주의 실체가 더 복잡하고 역동적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무로 생각하는 진공조차 사실 완전히 비어있는 공간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물질과 반물질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역동적 텅 빔'의 상태다. 고에너지의 광자(빛)는 물질과 반물질로 변환될 수 있으며, 이렇게 동시에 생성되는 과정을 '쌍생성'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물질과 반물질이 만나면 서로 소멸하면서 에너지를 방출하는데, 이를 '쌍소멸'이라 한다. 진공에서는 이 쌍생성과 쌍소멸이 매우 빠르게 반복된다. 마치 +1과 -1이 동시에 생기고 사라지면서 0이 되는 과정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과정이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진공은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벽한 무의 상태가 아니다.


이렇게 물질과 반물질은 만나면 사라진다. 우주가 탄생할 당시에도 물질과 반물질은 동시에 생성되었고, 그들은 끊임없이 쌍소멸과 쌍생성을 반복했다. 만약 물질과 반물질의 비율이 정확히 같았다면, 우주는 지금도 진공처럼 에너지만 가득 찬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완벽한 대칭은 어딘가에서 깨졌다. 물리학에서는 이 현상을 '대칭성 깨짐'이라고 부른다. 초기 우주에서 물질과 반물질의 대칭이 어긋나면서 물질이 반물질보다 아주 조금 더 많이 남게 되었다. 이 사소한 차이가 점점 쌓여 지금의 우주가 물질로 가득 차게 된 것이다.


만약 반물질이 더 많았다면 세상은 양전자와 음전하를 가진 양성자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세상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겠지만, 그 나름대로의 우주를 형성했을 것이다. 반면 만약 물질과 반물질의 대칭이 전혀 깨지지 않았다면 어떨까? 우리는 진공처럼 쌍생성과 쌍소멸이 반복되는 순수한 에너지의 바닷속에 있을 것이다.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 어떤 생명도 탄생할 수 없는 상태, 그저 끊임없는 에너지의 진동만이 가득한 공간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대칭성의 깨짐은 물질로 이루어진 우주를 촉발한 첫 번째 균열이었다. 그 작은 균열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주는 결코 탄생할 수 없었다. 균열은 우주를 창조하는 첫 번째 불씨였고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그 불완전함 덕분에 우리는 이 다채로운 우주 속에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균열을 나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작은 균열은 우주의 기적을 만든다. 균열 없이는 빛도, 생명도, 별도 존재할 수 없었다. 우리는 모든 균열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기회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 사회에서 균열은 단순한 분열이나 갈등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의 균형을 잡고 극단으로 치닫지 않도록 막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회적 안정감을 추구하며 이로 인해 때로는 획일성을 고집하려는 경향이 있다. 비슷한 생각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무리 지어 뭉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단일한 사상과 집단의 결집은 강력한 지도자나 강력한 국가가 자주 선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들은 국민을 하나로 묶기 위해 애국심을 고취하고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때로는 외부의 위협을 과장하여 국민을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는다. 이런 방식으로 결집된 공동체는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며 큰 성과를 이루기도 한다. 경제 개발과 인프라 구축 같은 대규모 사업들이 효율적으로 진행되고 계획이 순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의 이면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존재한다.


강력한 지도력 아래에서 빠르게 추진되는 국가 운영의 그늘에는 소수의 의견이 억압되고 묵살당하는 일이 빈번하다. 반대하는 목소리는 '반동분자'로 낙인찍히고, 그들은 사회에서 도태되도록 방치되거나 강제로 배제된다. 때로는 그들의 목숨이 위협받기도 한다. 우리는 민주화 과정을 통해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수없이 목도해 왔다. 단일한 사상을 강요하며 결집한 사회는 빠른 발전을 이루지만 그 과정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묵살하고 사회의 건강한 견제를 상실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내부에서의 사상 결집이 외부로 시선을 돌리면 그 결과는 더욱 파괴적이 된다. 자국민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사례는 역사 속에 수없이 존재한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서슴없이 다른 나라들을 식민지로 삼고, 자원을 착취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국주의 일본은 이와 같은 극단적 결집의 참혹한 결과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만행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압도적인 내부 지지와 단일 사상의 결집에 있었다. 만약 그들의 사상에 반대하고 그것을 견제할 만한 강력한 세력이 존재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히틀러에 반대하는 독일 내 소수의 저항 세력이 있었지만 그들은 너무도 소수였고, 대다수의 국민은 히틀러와 그의 정책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 상황에서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은 목숨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 반대의 목소리가 충분히 강력하고 주류 세력을 견제할 수 있었다면, 히틀러는 마음대로 세상을 어지럽히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균열은 단순히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회를 견고하게 유지하고 폭주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균열은 의견의 차이를 통해 서로를 견제하고 균형을 유지하게 만든다. 그것은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사회의 건강함을 유지하는 필수 요소다.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오히려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고, 그 안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균열이 없다면, 우리는 더 쉽게 무리 속에 파묻혀 자아를 잃고, 그 결과로 사회는 더욱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균열은 그 자체로 견제이며, 견제는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다.

갈등은 사회에서 때때로 암적인 존재로 비친다. 갈등을 유발하는 것은 사회의 조화와 안정성을 깨뜨리는 일로 여겨지며, 많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악행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갈등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결집이 명과 암을 모두 가지고 있듯 갈등 역시 밝은 면을 지닌다. 갈등은 일종의 견제 과정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회에게 그 방향이 과연 옳은 것인지 다시 한번 되묻고 재고하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한다. 견제가 없는 사회에서는 모든 의사결정이 순탄하게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순탄함이 반드시 올바른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현안이 점점 더 복잡하고 고도화되는 오늘날에는 효율성보다 방향성이 중요하다. 따라서 적절한 갈등이 있는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오히려 더 건강하고 활기차다. 노사갈등, 세대갈등, 젠더갈등… 이러한 다양한 갈등이 오늘날에도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 갈등의 결과로 인해 일시적인 피해가 발생할 수 있지만 이러한 불편함을 이유로 갈등이 전혀 없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다.


어릴 적 뉴스를 보면 국회의원들이 패싸움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교육을 받고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누가 봐도 이렇게 하면 될 텐데, 왜 구태여 발목을 잡고 서로 싸울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건 나의 오만이었고, 어린아이의 단견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당시 자명하게 옳다고 여겼던 판단이 사실은 잘못된 선택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조롱했던 국회의원의 의견이 결국 일리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국회의 문이 닫히고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 몸싸움이 벌어지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서로의 의견에 동의하며 모든 안건을 일사천리로 처리하는 국회는 더욱 위험하다. 여당과 야당이 적절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민주주의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삼권분립을 통한 상호 견제, 정치인과 국민의 서로 다른 역할, 그리고 보수와 진보의 다양한 이해관계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민주주의는 획일성을 추구하는 엘리트주의와 정반대의 철학을 지닌다. 엘리트주의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더 효율적인 정치 구조일지도 모르지만, 그 방향이 잘못될 경우 그 사회는 쉽게 파국으로 치닫는다. 독재자의 말로가 비참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반면 민주주의는 서로의 발목을 잡으며 상대를 저지하고, 문 밖으로 나가려는 상대를 다시 협상의 테이블로 끌어들인다. 이 대화가 길어질수록 외부에서는 시간 낭비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길고 지루한 대화를 통해 이뤄낸 합의는 훨씬 더 다각적인 면에서 개선된 결정을 내리게 한다. 민주주의는 직선이 아닌 나선형으로 나아간다. 단기간의 성과는 드물고,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느리게 움직이지만, 그 대신 쉽게 파국에 빠지지 않는다.


우주가 균열을 딛고 성장한 것처럼 사회도 균열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균열이란 단순히 분열과 갈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가 공존하며 사회를 더 건강하고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다. 균열은 견제이고, 그 견제가 있을 때 우리는 방향을 바로잡을 기회를 얻는다. 민주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 이 균열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균열은 개인의 성장에서도 필수적이다. 균열 없이 이루어지는 성장은 없다.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근육에 미세한 상처를 내야 하고, 이 상처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근육은 더 강하게 부푼다. 우리의 면역 체계도 마찬가지다. 무균실에서 자란 아이가 그곳을 떠나는 순간 모든 바이러스와 세균에 공격당하며 순식간에 건강을 잃을 것이다. 감기를 앓고, 흙을 만지고, 세균과 접촉하면서 우리의 면역 체계는 단련된다.


헤겔은 역사가 '정반합'의 과정으로 진보한다고 말했다. 주류 사상이 등장하면 그에 반대되는 사상이 맞서고, 이 둘은 충돌을 반복하며 마침내 새로운 합의에 이른다. 그 합의는 또다시 새로운 주류 사상으로 자리 잡고, 또 다른 반대에 부딪히며 성장한다. 이 과정 속에서 역사는 진보해 왔다. 나의 삶을 돌아보면, 나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성장해 왔다. 초등학교 시절 태권도 겨루기 선수를 꿈꾸며 운동에 매진했지만 실력 부족과 부상으로 그만두어야 했다. 그 후 학업으로 진로를 전향하고 공부에 몰두하면서도 여러 차례 실패를 맛보았다. 사회에 나와서도 크고 작은 문제를 겪는 중이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맞닥뜨리면 잠시 좌절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여러 시도를 하고 사고가 성숙해진다. 그런 성숙한 사고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비슷한 문제를 만났을 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인류의 스승인 석가모니조차도 단번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그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행을 겪었고, 그 경험이 있었기에 마침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찬란한 결과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다. 갈등과 난관, 실패와 좌절은 우리의 성장을 위한 귀한 자양분이 된다. 이런 경험들은 우리의 사고를 단련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결과만을 바라보기보다 그 결과를 위해 우리가 걸어야 하는 과정에 더 집중해야 한다.


불편함을 마주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성장한다. 성장하려면 지금의 안락한 삶에 기꺼이 균열을 내야 한다. 현재에 안주하면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없다. 불편함은 우리를 괴롭게 하지만, 그 불편함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발전한다. 균열은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마치 우주가 균열 속에서 탄생하고 화려한 별들이 태어났듯이, 우리의 삶에서도 균열은 우리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끄는 힘이 된다.


균열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이다. 균열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속에서 성장의 가능성을 발견하라.

 당신이 꿈꾸는 삶은 그 균열의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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