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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책방 Sep 09. 2024

알이 닭보다 먼저다.

생명의 기원

일본 음식 중에는 독특한 이름과 이야기를 가진 요리들이 많은데 오야꼬동도 그중 하나다. 오야꼬동은 따뜻한 밥 위에 닭고기와 달걀을 얹어 먹는 덮밥 요리로, 그 이름은 일본어로 '부모와 자식'이라는 뜻을 가진다. 닭고기와 그 닭의 알이 함께 사용된다는 이유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이름을 들으면 "이건 좀 잔인한 조합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접시에 엄마와 자식을 함께 내놓다니… 물론, 그걸 맛있게 먹고 있는 우리가 더 잔인한지도 모른다.


맛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나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떠올렸다. "닭이 마일까, 알이 엄마일까?" 평소에는 당연하게 닭이 엄마고 알이 자식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곰곰이 생각하니 이 둘의 순서가 점점 더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알에서 닭이 부화한다면 알이 엄마인 걸까? 아니면 닭이 정말로 모든 것의 시작일까? 단순해 보이는 이 질문은 사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담고 있다.


고대부터 이어져 온 "닭과 알" 논쟁은 그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묻는 철학적이고도 과학적인 질문의 축소판이다. 알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묻는 것은 곧 생명은 과연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지, 아니면 오직 생명체로부터만 태어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 오랜 질문은 생명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세대에 걸쳐 논의되었고, 그 과정에서 생명의 기원에 대한 놀라운 통찰들이 탄생했다.


생명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과학자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이어져 왔다. 그 중심에는 두 가지 상반된 이론이 있었다. 하나는 자연에서 스스로 생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자연발생설'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생물은 이미 존재하는 생물에서만 태어날 수 있다는 '생물속생설'이다. 이 두 이론 중 자연발생설이 먼저 과학적 진리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자연발생설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벼룩은 먼지에서, 구더기는 썩은 고기에서, 물고기는 호수 바닥의 진흙에서 저절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는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모든 만물에 생명의 씨앗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고, 이는 자연발생설의 근간을 이루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현미경이 없었기에 벼룩이나 구더기의 알을 볼 수 없었고, 자연에서 생물이 갑자기 생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믿음은 중세를 거쳐 17세기까지도 이어졌으며, 생명의 원천을 신비한 '생기(生命氣)'로 설명하는 생기론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모든 생물이 다른 생물로부터 태어난다는 '생물속생설'이 더 직관적으로 맞아 보인다. 우리 모두는 부모가 있고, 그 부모에게도 부모가 있는 세상을 경험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속생설은 자연발생설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과학계에 쉽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


17세기가 서야 이탈리아 의사 프란체스코 레디가 최초로 생물속생설을 지지하는 실험을 시도했다. 그는 두 개의 플라스크에 고기를 넣고, 하나는 개방해 두고 다른 하나는 철망으로 덮어두었다. 며칠 후, 철망을 덮지 않은 플라스크에만 구더기가 생겨나는 것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생물이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생물에서 유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실험은 처음으로 자연발생설에 대한 도전이었고, 생물속생설을 주장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 자연발생설은 다시 강력한 반론을 제기받았다. 영국의 생물학자 존 니덤은 현미경을 사용하여 고기즙을 플라스크에 넣고, 코르크 마개로 입구를 막은 뒤 가열해 멸균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니덤은 멸균된 고기즙에서도 미생물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자연발생설이 옳다고 주장했다. 이 결과는 자연발생설이 다시 주목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신부이자 생물학자였던 라자로 스팔란차니는 니덤의 실험을 반박했다. 그는 니덤의 실험에서 코르크 마개가 완벽하게 플라스크를 밀봉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플라스크의 입구를 아예 용접하여 실험을 재현했다. 이 실험에서는 미생물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니덤은 공기가 통하지 않으면 생기가 유입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반박을 이어갔다.


이처럼 자연발생설과 생물속생설의 논쟁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19세기 중반, 우리에게 우유로 유명한 프랑스의 화학자 루이 파스퇴르가 이 논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파스퇴르는 백조목 플라스크를 이용한 정교한 실험을 고안했다. 그는 S자로 구부러진 긴 목을 가진 플라스크에 고기즙을 넣고, 플라스크의 입구에 물을 넣어 공기는 통하지만 미생물은 들어갈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생기가 들어가지 않아서 그렇다는 의견을 고려한 설계였다. 이후 고기즙을 가열해 멸균하고, 시간이 지나도 미생물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파스퇴르의 실험은 자연발생설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생물속생설이 과학적 사실임을 확증한 결정적인 증거로 인정받았다.


생물의 기원을 둘러싼 이 긴 여정은 과학자들이 직관을 넘어 증거를 통해 진리를 찾아가려는 끈질긴 노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과학이 어떻게 진화하고,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지 깨닫게 된다.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과 직관에 부합하는 생물속생설이 결국 논쟁에서 승리한 것은 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만약 먼지에서 벼룩이 태어난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면, 우리완전히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엄마"를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는 벽에 부딪힌다.


그렇다면, 최초의 엄마는 누구였을까?


어떤 사람들은 쉽게 "그것은 신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과학은 그 이상의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한다. 생물속생설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는 부모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로는 생명의 '최초'를 밝힐 수 없다. 모든 생물에게 부모가 필요하다면, 최초의 생명체는 어떻게 발생했을까? 이 지점에서 생물속생설의 한계가 드러난다. 바로 여기에서 과학은 새로운 질문과 함께 또 다른 길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어떤 이론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과학자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새로운 연구 주제가 생겼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불편하게 느끼는 이러한 한계를 새로운 탐구와 발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들은 마치 수많은 해적들이 보물섬을 찾기 위해 미지의 바다로 떠나는 것처럼 최초의 생명체를 찾기 위해 실험실이라는 또 다른 미지의 바다로 향한다.


생명의 기원을 찾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생명체라고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중학교 교실에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것이다. 어떤 학생은 "움직이면 생물"이라고 말할 것이고, 또 다른 학생은 "싸야 생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자식을 낳아야 생물"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자체로 생물의 조건을 충분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돌은 생물이 아니고, 강아지는 생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을 요구받으면 생물 교사인 나조차도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다행히 생물학계에서는 생명체를 정의하는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생명체는 외부 환경과 자신을 구분하는 경계를 지녀야 한다. 이 경계는 흔히 세포막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둘째, 생명체는 자기 복제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DNA나 RNA와 같은 유전 물질이 필요하다. 셋째, 생명체는 대사 과정을 통해 에너지를 얻고 물질을 전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 효소와 같은 단백질이 필수적이다. 요약하자면, 생명체는 막 구조, 유전 물질, 그리고 대사에 필요한 단백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조건들을 충족한다면, 비록 우리가 상상하는 형태와는 다를지라도 과학적으로 생명체로 간주될 수 있다.


또한 생명체는 유기물로 구성되어 있다. 유기물과 무기물의 차이는 탄소화합물의 존재 여부에 있다. 유기물은 생명체를 이루는 기본적인 물질이고, 무기물은 흙, 돌 등과 같은 비생물적인 자연 물질을 구성한다. 따라서 막 구조, 유전 물질, 대사에 필요한 단백질 모두는 유기물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 최초의 생명체를 찾는다는 것은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형성된다는 개념이 막연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대기 중에서 아미노산과 같은 기본적인 생명 구성 요소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미노산은 단백질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다. 최초의 생명체를 찾는 과학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우리와 같은 복잡한 형태의 생명체가 아니라, 생명체로써의 기본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물만 갖춘 매우 단순한 수준의 세포일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했던 신비한 ‘생명의 씨앗’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명의 기원을 찾기 위한 과학적 탐구이다.


생명은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 질문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미스터리 중 하나로, 과학자들 역시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생명의 기원을 이해하려는 이러한 노력의 한가운데, 1952년 스탠리 밀러와 해럴드 유리의 실험이 있었다. 이 실험은 원시 지구의 환경에서 생명의 기본 구성 요소인 유기물이 자연적으로 생성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당시 원시 지구의 대기는 오늘날과는 크게 달랐다. 현재의 대기는 질소와 산소가 주를 이루지만, 원시 지구의 대기는 수증기, 메테인(CH₄), 암모니아(NH₃), 수소(H₂)로 구성되어 있었다. 산소가 거의 없는 환경이었다. 아마도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원시 지구는 꽤 살기 어려운 곳이었을 것이다. 특히 암모니아가 대기 중에 가득했다면 지구는 화장실 냄새에 휩싸여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원시 지구에서는 번개가 매우 자주 발생했.


밀러와 유리는 이러한 환경을 실험실에서 재현하고자 했다. 그들은 플라스크에 메테인, 암모니아, 수소, 수증기 등 원시 대기의 성분과 같은 화학물질을 넣고, 전극을 통해 인공적인 번개를 만들어 전기 방전을 일으켰다. 이 인위적인 번개는 대기 내 화학물질들 간의 분해와 재결합을 촉진시켰다. 그 결과, 메테인과 같은 단순한 탄소 화합물이 분해되면서, 탄소가 다른 원소들과 결합하여 원시적인 아미노산과 같은 유기 화합물을 형성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 실험은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생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증거였다. 즉, 생명의 기본 구성 요소가 자연환경에서 스스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이후의 연구들은 이러한 원시적인 유기물이 특정 조건에서 점차 복잡해질 수 있으며, 반복적인 화학적 과정과 농축을 통해 막 구조, 유전 물질, 그리고 대사에 필요한 단백질 같은 복잡한 분자 구조로 진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코아세르베이트(coacervate)와 같은 구조는 일정한 조건에서 막 구조를 형성하고,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는 기능을 가지게 된다. 비록 이것이 진정한 생명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 해당하는 초기 생명체의 출발점을 암시할 수 있다.


그러 이러한 화학적 진화가 어디서 일어났는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현재 과학자들은 가장 유력한 생명의 기원지로 심해 열수분출구를 꼽고 있다. 심해 열수분출구는 해저 화산 활동에 의해 형성된 고온의 물이 분출되는 곳으로, 이곳에서는 황철석(pyrite)과 같은 금속 황화물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황철석은 효율적인 촉매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이곳의 구불구불한 지질 구조는 유기물이 농축되고 반응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한다.


또한, 심해 열수분출구의 극한 환경은 다양한 화학반응을 일으키기에 적합한 고열과 고압을 제공한다. 이로 인해 심해 열수분출구는 원시적인 유기 분자들이 복잡한 생명체의 기본 구성 요소로 발전할 수 있는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 현재 이 가설은 지구상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시작된 장소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결국, 생명은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유기물에서 더 복잡한 분자 구조로, 그리고 마침내는 자가 복제와 대사를 수행할 수 있는 생명체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아직도 이 모든 과정의 세부적인 메커니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밀러-유리 실험과 심해 열수분출구 가설은 자연에서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는 우리가 언젠가 생명의 기원에 대한 미스터리를 완전히 풀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를 심어준다.


오야꼬동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어쩌다 보니 심해열수구까지 흘러오게 되었다. 이제 이 흥미로운 여정을 정리해 보자. 우리는 닭과 알의 관계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생명의 기원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로 이어졌다.


생명의 기원을 탐구하는 과학자들은 심해 열수분출구 근처에서 최초의 원시적인 세포가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그곳은 막구조를 형성할 수 있는 지질, 자기 복제를 할 수 있는 유전물질, 그리고 다양한 화학반응을 촉진할 수 있는 단백질이 자연적으로 생성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이 최초의 원시 세포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알'에 해당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알 같은 원시 세포는 자기 복제를 통해 자식을 만들었지만, 완전히 같은 자식이 아니라 '조금 다른' 자식 세포들을 만들어냈다. 이 '조금 다른' 자식 세포들은 그들만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고, 각기 다른 환경에서 생존하고 번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수억 년에 걸쳐 반복되었다. 세포는 계속해서 분열하고 변이를 일으키며 환경에 적응해 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이 작은 차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존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특성으로 작용했고, 환경에 맞춰 적응한 세포들이 번성하면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진화하게 된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이러한 '알' 중에서 어떤 것은 조류로, 다시 말해 '닭'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완벽하게 모든 과정을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닭보다 먼저 알이 존재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라는 오랜 논쟁도 여기서 마무리된다. 닭은 그저 진화의 긴 여정 중 하나의 결과일 뿐이며, 그 시작은 알이라는 원시적인 존재였다. 이제 우리는 오야꼬동을 떠올릴 때, 그것이 단지 요리의 이름만이 아니라, 생명의 기원을 둘러싼 흥미로운 논쟁과 진화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명의 기원에 관한 이런 질문들은 계속해서 우리를 더 깊은 탐구로 이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과학은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생명의 기원을 찾는 일은 그저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과정은 우리 자신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 여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기원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나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일에 직결되어 있다. 어떤 것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원인을 찾고 그 뿌리를 탐구하는 접근은 많은 통찰을 제공한다. 나의 위치를 살펴보는 것은 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며, 그 뿌리에서 시작해 나의 속성들을 하나하나 발견해 나가는 과정에서 인간의 본질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보통 육체를 나와 세상의 경계로 생각한다. 세포의 막이 내부와 외부를 나누듯, 우리의 육체는 나와 외부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다. 이 경계가 없다면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서부터 세상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현실 세계를 경험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나'라는 경계가 고통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육체에 대한 집착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겪는 많은 괴로움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육체의 '나'라는 개념 자체도 결국은 진화의 산물이다. 우리 조상들의 생존과 번식을 돕기 위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개념인 것이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진정한 '나'는 육체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경계를 뛰어넘는 것은 우리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육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견해는 일리가 있지만, 이를 실천하는 일은 매우 어려우며, 그렇기에 오랜 수행과 수련이 필요하다.


동양 철학서 <대학>에서는 생명을 "성"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성은 생존하려는 본능, 곧 생명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를 과학적으로 풀이하자면 생식하고자 하는 욕구로 볼 수 있다. 생존과 생식은 원시 세포에서부터 이어져 온 생명체의 본질적 속성이다. 원시 세포는 자가 복제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로 전달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전자는 생각이나 의지를 지닌 것이 아니다. 유전자는 단지 특정한 조건이 맞으면 복제를 시도하는 특성을 지닌 존재일 뿐이다. 수소가 불을 만나면 폭발하는 것처럼 유전자도 적합한 환경을 만나면 자기 복제를 시작한다. 이러한 유전자의 성질은 생존하려는 욕구로 표현한 것이지 유전자가 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오해해선 안된다. <대학>에서 말하는 성(性)을 생명의 본질로 보는 관점은 과학적으로도 매우 적합한 비유로 보인다.


죽기 전에 자신을 닮은 로봇을 만드는 로봇을 상상해 보자. 이 로봇은 인간과 거의 유사한 외모와 행동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그것을 생명체로 인정할 수 있을까? 물질대사가 일어나지 않는 차가운 금속 심장을 가진 존재를 생명체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왜 우리는 로봇을 생명체로 인식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는 본능적인 기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체로 여겨지는 것에는 끊임없이 자신을 복제하고 대사를 통해 에너지를 생성하는 유기적 활동이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생명의 기원을 탐구하는 일은 단지 생화학적인 과정이나 진화의 역사를 알아내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체인 '나'를 탐구하는 과정이다. 원시 세포의 속성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으며 우리의 육체와 정신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된다. 생명의 기원을 묻는 일은 나와 세상의 관계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진정한 나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단순한 철학적 제언이 아니라 의 기원을 탐구하는 여정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기원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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