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호캉스라는 말이 신조어로 탄생하며 많은 사람들이 누린다. 호텔과 바캉스(휴가)를 합쳐서 만든 말로 '호텔에서 즐기는 휴가'를 의미한다. 12월 초 즈음 평일에 휴가를 사용하게 되어 제대로 된 호캉스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누려보고자 호텔을 예약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민다라고 생각해보자.
대략적으로 모두가 생각하는 크리스마스트리 이미지는 같겠지만 개인이 꾸미는 방법과 장식품들은 저마다 다른 것처럼, '호텔에서 보내는 휴가'라는 보편적인 개념에서 내가 생각하는 호캉스를 구상해보고 실현해보고자 했다. 호텔에서 누리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나만의 방식으로 꾸미는 것.
해외여행이나 다른 일반적인 국내 여행 시 호텔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여행지를 둘러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체크인 시작부터 체크아웃까지 호텔에서 쭉 있기란 쉽지 않다. 이번 기회에 호텔에서 하루 종일 보내는 것이 나의 소망이자 목표였다. 한 해 동안 여러모로 수고 많았던 나에게 주는 선물이란 것은 덤이다.
1박 2일 호캉스는 해운대의 어느 호텔로 정했다. 숙소를 선정하는 데에도 생각보다 많은 고민을 한 듯하다. 나에게 필요한 조건은 큰 것은 없었지만 스탠드와 책상이 있었으면 했다. 혹시나 그림 그리거나 글을 쓸 때 필요해서다. 호텔 사진에 스탠드와 책상이 있는 것을 보고 곧바로 결제했다.
쉬는 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들고 세시 조금 넘어 호텔에 체크인했다.
숙소와 관련된 설명들을 해주시는 직원분이 체크아웃은 12시라고 말해주셨다. 이번에 제대로 호텔에서 쉬겠구나 생각 들었다. 11시와 12시 체크아웃은 1시간 차이일지 모르지만 아침에 온전히 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중요한 시간이다. 출근이나 등교 시간이 한 시간 미뤄져 30분 이상을 더 잔다고 생각해본다면 이보다 더 달콤할 순 없다.
객실 카드를 받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11층에 가야 했다. 어라, 11층이 눌러지지 않았다. 호텔을 밥먹듯이는 아니지만 처음 온 것도 아닌데 당황했다. 예전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카드를 엘리베이터 층을 누를 수 있도록 활성화하는 곳을 찾아 카드를 갖다 놓았다. 웬걸, 그러고도 11층이 눌러지지 않았다. 순간 과학이 더 발달했는지 최신 승강기는 또 다른 방법이 생겼나 싶었다. 보안이 더욱 강화되었나. 당황한 채로 나와 다시 옆의 엘리베이터를 탄 뒤, 다시 카드를 인식시키고 고대하던 11층을 눌러봤다. 드디어 됐다. 처음부터 아마추어처럼 숙소에 가지도 못하다니. 엘리베이터 안에 나만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살짝 땀을 삐질 흘렸던 것과 이리저리 눌러보며 수상한 행동을 한 것은 나와 CCTV만 아는 둘만의 비밀이다.
드디어 숙소에 입성했다. 폭설이 온 날, 지붕에 포근하고 두껍게 자리 잡고 있는 듯 새하얗고 두툼한 이불이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그 위론 하나면 충분할 것 같지만 침대에 편하게 기대어 책을 읽으라는 의미인지 베개가 네 개나 있었다. 창가에는 내가 원했던 책상과 큰 스탠드 그리고 그 옆에는 잠시 앉아서 쉬어도 좋을 소파까지 완벽했다.
제일 먼저 짐을 풀고 침대에 앉아 책을 꺼내 들었다. 퇴사한 뒤 영국에서 살아보는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였는데, 한번 더 읽고 싶어 챙겨 왔다. 베개 두 개는 두툼히 뒤에 포개 등을 기대는 데 사용했고 다른 한 개는 책을 놓을 수 있도록 이불 위에 올려놓고 책을 읽었다. 옆 탁자에는 조금 전에 사 왔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놓고 마시면서 기분 좋게 읽어 내려갔다. 폰은 무음으로 바꿔서 돌려놓은 채 책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책 읽는 데에 더할 나위 없는 최적의 조건이 주어졌음에도 집중력이 오래가지 못했다. 1시간도 채 내리읽지 못했다. 그러다 티브이를 틀었고 예능 '라디오스타'가 나와 30분간 보다가 끄고 다시 책을 읽었다. 티브이를 보는 것도 호캉스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평소에 잘 못하던 것을 하고자 해선지 더 보면 안 되겠다 싶어 껐다.
오후 6시가 넘어가니 배가 고파졌고, 간단히 먹자 생각하여 유명한 분식집에서 떡볶이, 튀김, 순대, 김밥을 포장하여 사 왔다. 그리고 콜라와 자기 전에 영화 보면서 마실 맥주 한 캔도. 포장해올 때까지만 해도 다 먹을 수 있겠다 싶었지만 풀어놓고 보니 많았다. 두 명도 빠듯할 것 같았다. 결국 배불리 먹고도 남겼다.
배도 부르니 자연스레 책상에 앉았다. 코로나로 인해 올해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아트마켓에 대한 생각들과 앞으로 어떠한 굿즈를 하면 좋을지 고민하려 노트북과 공책들을 꺼냈다. 2017년도부터 아트마켓을 했던 날짜들을 써 내려가다 2020년에는 쓸 것이 없었다. 내년에는 꼭 할 수 있길 기대해보며 굿즈에 대한 아이디어를 끄적이다 다시 책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
숙소에 와서 보니 예상치 못했던 선물이 있었는데 바로 '욕조'였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한 사람이 들어가서 따뜻한 물에 푹 담겨 몸을 풀 수 있을 정도는 충분했다. 침대 위에서, 책상 위에서, 소파 위에서 이리저리 쉬다가 이제는 몸을 따뜻하고도 뜨거운 물에 들어가고 싶어서 물을 콸콸 틀었다. 노트북으로 이런저런 검색을 하면서 욕조에 물이 다 찼는지 확인하려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다. 갑자기 초등학교 때 수학 문제가 떠올랐는데 '분당 몇 10L씩 나오는 수도꼭지에 200L 크기의 욕조가 가득 차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과 같은 문제처럼 여기 욕조에도 그런 정보가 있었다면 한 번에 시간 맞출 텐데 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했다.
음악을 틀어놓은 채 따뜻한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들어가 20~30분 정도 있었다. 근육이 풀리면서 나른해졌고 잠이 올 뻔했다. 그래도 아직 영화도 봐야 하고 할게 많은데 여기서 잠에 항복할 수 없었다.
몸을 개운하게 한 뒤에 어떠한 영화를 보면 좋을지 고르기 위해 '크리스마스 영화'로 검색했다. 음악적 요소가 들어간 영화면 좋겠다 싶었는데 바로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이었다. 영어로 된 제목은 'Music & Lyrics'로 직독 직해하여 '음악 그리고 가사'로 했다면 관객 수가 감소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의역이 참 잘된 케이스다. 비슷한 예로 한 번쯤은 들어봤을 '첫 키스만 50번째'의 원래 영어 제목은 '50 First Dates'이다.
유튜브에서도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한 화면과 자극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글이 담긴 '썸네일', 20분 정도만 되어도 잘 보지 않는 '재생시간'에 따라 클릭해서 보느냐가 나뉘는 요즘, 제목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마냥 자극적이진 않게 궁금증을 유발할 수 있는 제목을 생각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한 손에는 맥주를 들고 휴대전화 화면을 티브이에 동기화하여 영화를 틀어 감상했다. 넓은 침대에 혼자 따스하게 이불을 포근히 덮은 채 영화를 감상하니 제대로 호텔에서 누리고 있음을 실감했다. 아무 걱정 없이 온전히 나를 위해 보내는 시간은 소중하다.
오전의 알람 하나도 맞추지 않은 채 잠에 들었고 늦지 않게 깼다. 이것이 바로 호캉스구나. 비록 1박 2일이었지만 체크아웃하기 전까지도 알차게 방에서 누렸다. 내가 구상했던 것들을 모두 충족시켰고 큰 힐링이 되었다. 내가 해봤던 것들 말고도 호캉스에서 누릴 것들은 많다. 가족과의 호캉스, 친구들과의 호캉스, 연인과의 호캉스 모두 가치 있고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한 번쯤은 본인만을 위해서 스스로 쉴 수 있도록 혼자 호캉스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