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출산 전에는 주말이 되면 아내랑 단 둘이서 술 한잔 기울이는 것이 소소한 일상의 재미 중 하나였다. 맥주 한 모금이 주량인 아내는 음주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잔을 기울이는 것은 의식에 불과할 뿐, 우리들의 주말 저녁 시간은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기억에 남지 않을 것을 알지만 밀렸던 이야기를 두서없이 쏟아내며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의 빈자리를 서로 채워주곤 했다.
신혼의 부산스러운 시기를 지나고 균형이 잡혔다고 생각했던 일상은 아들의 탄생과 더불어 와장창 깨져버렸다. 우리는 아니, 나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 이후 새로운 균형을 찾아 헤매고 있는 중이다. 퇴근과 동시에 이두근으로 아들을 받아 들고 아내는 못다 한 휴식과 밀린 것들을 해결한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를 제대로 나눌 시간이 없다.
주말마다 열렸던 나의 아무 말 대잔치는 개최될 날을 잃어버렸고 쌓여가는 나의 아무 말들은 어쩔 수 없이 아들 앞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가 배구공 윌슨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필연적으로 아들을 나의 '윌슨'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기저귀를 갈면서 상사의 욕을 하고 젖을 먹이며 오늘 봤던 뉴스를 평하고 목욕을 시키며 내일 해야 할 일을 되새겨본다.
아들은 아직 모음 하나 조차 제대로 발음할 수 없지만 살아있는 존재가 맑은 눈동자로 내 눈을 쳐다보며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소통 욕구가 해소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내 말에 반응하는 아들의 수준은 배구공과 다를 바 없지만 톰 행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의 반응에 멋대로 의미부여를 해버린다. 가끔 트림 혹은 단순히 내쉬는 숨으로 내 말에 맞장구 쳐주는 모양새를 보이면, 반색하여 라테를 좋아하는 직장 상사들처럼 말을 길게 이어 나간다.
아들은 점점 자라서 배구공이 아닌 사람이 되어 갈 것이다. 부모의 말에 맞장구도 잘 치고 재밌게 대화를 할 때가 많이 질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이 나이가 들어 대화가 점점 잘 되어갈수록 우리 가족을 떠나려고 할 것이다. 어느날, 불쑥 여자를 데려오고 세상의 반대편에서 살겠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별을 통보받게 되면 망망대해로 떠내려가는 윌슨을 향해 절규하던 톰 아저씨처럼 굴지도 모른다. 한참 후유증을 겪다가 익숙해지겠지만, 늙어버린 내가 아주 오래전 육아에 갇혀 말 한마디 없는 나의 배구공만 바라보던 그때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할 것 같은 확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