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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혼 Oct 24. 2021

흔들리는 편안함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이들은 부모의 품을 좋아한다. 영아 때는 세상천지 구별도 못 하면서 부모의 품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좀 더 크면 의도적으로 부모의 품을 찾아 파고든다. 등센서라는 말도 있어서 품에서 내려놓기만 하면 자다가도 울면서 깬다는 아이들이 있고, 쌀 포대만큼 무거워져도 부모의 품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 아이들이다.


 실제로 아이들은 촉각을 느끼면서 잔다고 한다. 따라서 등센서라는 말은 틀린 것이 아니며 온몸의 촉각이 무수한 센서로 민감하게 작용하는 까닭에, 부모들은 감히 아이를 내려놓을 생각을 못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모의 고민은 커져간다.


 울부짖는 아이들의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면 부모들은 아이를 안고 싶어 지며, 안아주면 더 나아질 것을 기대한다.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절규하다가 품 안에서 점점 진정되어서 천사 같은 얼굴을 하는 아이를 보면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밀린 집안일과 달콤한 휴식을 생각하면 내려놓고 싶다가도 다시 울까 봐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사람들의 의견도 분분하다. 전문가마저도 울려라는 전문가가 있고 호르몬을 이야기하며 우는 아이를 진정시켜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전문가가 있다. 손 탄다며 혀를 차는 사람들, 이때 아니면 언제 아이를 안아주냐는 사람들도 있다.


 나와 아내는 다행스럽게도 의견이 일치한다. 둘 다 안을 수 있으면 안자는 주의다. 손목이 꽃게의 다리처럼 똑 떨어져 나가더라도 안아주는 것이 우선이다. 아기띠도 여러 개 사봤지만 다리를 차고 감옥에 갇힌 듯이 울어버리는 탓에 미천한 두 팔로 받들어 모신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포옹에 위로나 안정을 찾는다는 것은 어린 시절에만 집중해서 겪는 특별한 경험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을 위해 누군가가 온전히 안아주는 일을 점점 경험하기 힘들게 된다.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러 복잡한 이유들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게 만든다.


 나 또한 그렇다. 위로가 필요한 상황에서 선뜻 안아준 적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난히 가부장적인 집안의 사내인 나에게 안는다는 행위는 받아본 적도, 한 적도 거의 없었다. 운동선수들의 열정적인 포옹, 힙합 스타일의 인사도 나와는 거리가 멀었고 친밀한 표현이래 봤자 어깨를 툭툭 두드리거나 하이파이브 정도다.

 

 하지만 아들은 달랐다. 아들은 안아주는 행위에 생존의 유무가 달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려놓는 순간, 영화에서 고문을 당하는 주인공처럼 비명을 지른다. 잠깐 내려놓았을 뿐인데 다시는 내려놓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악을 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겁해서 아들을 안아 올리면 아들은 몸과 마음(?)을 온전히 나에게 맡겨버린다. 엄마 뱃속에서 지냈던 것처럼 품 속에서 살아간다. 꿀떡꿀떡 모유를 삼키고 트림을 하고 방귀를 뀌는 등 정말 뱃속에 있는 것처럼 오만가지 행동을 다 해낸다. 그리고는 스르륵 잠이 든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들을 안는 것에 익숙해져 갔지만 늘어나는 아들의 체중과 안아주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우리 부부의  부담이 커져갔다. 또, 점점 우렁차게 커지는 울음소리, 하늘로 솟아오를 것처럼 힘찬 발길질, 가끔씩 브레이크 댄서처럼 프리즈 하는 등 다양한 아들의 횡포에 우리는 지쳐갔다.


 더 이상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들은 달콤한 미끼를 던졌다. 눈도 못 맞추던 녀석은 어느 순간 가까이 가면 울음을 멈추기 시작했고 생리적 욕구가 모두 충족되면 실실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부모의 표정을 보고 따라 웃거나 허공을 보면서 웃는 모습도 보였다. 아들의 그런 변화에 너덜너덜해진 손목은 진통제를 맞은 듯 감각이 사라졌고, 우리는 다시 열심히 안아 올리게 되었다.


 100일도 되지 않았지만, 태어났을 무렵보다 많이 달라졌다. 아무것도 못하던 녀석이 안는 자세를 가리고, 내려주길 원하고, 고개를 휙휙 돌리며 보고 싶은 것을 보려고 한다. 여전히 부모의 품에 종속되어 있긴 하지만 점차 부모의 품을 안전 기지로 삼아 조금씩 멀리 탐험하다가 언젠가는 혜성처럼 몇 년에 한 번 찾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흔들리는 품 속에서 편한 아들처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순으로 가득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열꽃을 피워내면서까지 서로 달라붙어 있는 지금 이 순간이 힘들어 죽겠지만, 찾아올 날이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벌서부터 서운해하는 나 또한 그랬다.


 지긋지긋한 육아를 탈출해서 출근하는 순간, 아기가 보고 싶고 걱정되는 것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집에 돌아가면 또 내 한 몸 희생하여 아들을 받들어야 한다. 붙어 있지만 떨어지고 싶고 떨어지면 보고 싶은 아들에게 내가 해주어야 하는 것은, 안아줄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 꼭 안아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들이 빠르게, 천천히, 자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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