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는 집단주의에 비해 개인 간 경계가 분명하다. 개인과 개인이 명확히 구분된다. 개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존중받는다.
'존중'
좋은 말이지만 개인주의 사회에서 그 의미가 재구성되고 있다. 존중은 타인의 생각을 듣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다. 의문이 드는 부분은 묻고 확인하면서 마음의 의문을 해결하며 타인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지금은 너는 너, 나는 나... 의 방식으로 단절되고 있다. 듣고 마는 것에 그치면서, 너는 너대로 살아라 경계지으면서 이를 존중이라 표현하고 있다.
개인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라고 하지만 과연 우리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울타리가 개인과 개인 사이에 놓이고 있다. 인간은 개인의 울타리도 필요하지만 나의 울타리 너머 공동의 울타리도 필요하다. 한 개인이 소속된 울타리가 줄어들고 있다.
사회에 적응하고 공동체에 소속되는 능력인 사회성의 정도는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다. 개인주의가 심화될수록 어딘가에 소속되기 위해 요구되는 시회성의 수준은 자연스럽게 높아진다. 이에 따라 소외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 안에서 소속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결국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 즉 실존에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 결핍으로 인해 상당 수준의 심리적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늘게 된다.
'소속감'은 주체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토대이다. 인간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면 외롭고 고독해진다. 소속은 구성원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고 안정감을 얻게 해 준다. 외롭고 고독한 인간은 실존적 위협을 받는다. 실존의 위협이란 스스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 세상에 대한 허무 등을 느끼게 되는 상태이다.
개인주의 사회는 개인과 다양성을 존중하지만, 그로 인해 개인을 소외시키는 결과도 함께 가져온다. 이에 따라 소외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달콤한 말에 쉽게 현혹된다. 또 누군가는 직접적, 간접적 방식을 통해 이런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그들은 종교적 포섭 행위, 사기 행위 등처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소외된 사람들의 어두워진 내적 욕구를 유혹한다. 그런 유혹에 마음을 나누게 된 사람은 결국 자신이 지지받을 수 있는 그곳에 소속되어 활동하기 시작한다.
소속은 너무나 소중해진다. 그리하여 소속된 곳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장과 그 내용의 실상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실존적 위협을 받은 결핍의 상황에서 벗어나 함께 힘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우리'가 된 이상 실제나 사실과는 관계없이 소속이 곧 진실이 되고 만다. 이렇게 하여 극단적 소수의 전체주의가 생겨난다. 개인주의가 전체주의를 낳는다. 소속이 목적인 사람들과 집단을 통해 특수한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들이 맞물려 극단적 소수의 특수한 목적이 다수가 원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학교에서 학생들만 보아도 예전과 매우 다르다. 함께 뛰어노는 시간보다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는 데에 익숙하다.
나는 아직도 점심시간에 아이들이 매우 낯설다. 각자의 스마트폰을 보면서 말없이 영상을 본다. 한 손은 식사를 하고, 남은 손으로는 영상을 넘긴다.
아이들이 거짓말로 친구의 시선을 따돌리고 반찬을 빼앗아 먹었으면 좋겠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맛있는 디저트를 한 입씩 더 먹고 덜 먹었으면 좋겠다. 너는 다섯 개를 받았지만, 나는 여섯 개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5교시 수업 시간 종이 친 후에 쾌쾌한 땀냄새를 풍기면서 줄줄이 뛰어 들어왔으면 좋겠다. 학생이 개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도 자신들만의 문화 속에서 관계를 형성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외되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은 예전에도 있었다. 그런데 예전보다 지금의 아이들이 더 구석진 곳으로, 더 깊이 소외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을 통해 스스로 맘 편히 소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일은 우리 사회의 근간을 생각하는 일이다. 아이들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 사회의 현재가 어떠한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복잡다단한 사회를 생각하면 골치가 아프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생각이 단순명료해진다. 사회적 문제의 현상은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문제의 근원은 그리 다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도 연민과 친절이 필요하다. 연민과 친절은 나와 너를 연결하고 묶을 수 있는 힘이다.
아이들은 아이이기 때문에 저절로 그런 마음이 들지만, 사회의 어른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자연히 들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에 아이를 고민하는 시간은 내 삶의 방향과 우리 사회의 방향을 고민하는 시간이 된다.
아이들이 서로의 생각, 가치관, 감정들을 주체적으로 표현하고,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과 가치를 점검하면서 특정 방향으로 지나치게 뻗어 있는 생각이나 가치를 중화할 수 있었으면. 그런 과정의 결과를 여러 선생님과 학부모가 함께 공유하면서 다시 아이들에게 환류하는 시간들을 통해 아이들이 삶에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으면. 어른들도, '우리'라는 이름으로 연결되는 지점들이 많이 생기고, 연민과 친절을 나누는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말. 당위적 진리처럼 반박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일정한 규범과 문화가 있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되듯이, 우리 사회의 규범과 문화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개인주의가 심화되는 우리 사회는 그러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만 같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 하게 내버려 두어도 괜찮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기 전에 앞서, 다양한 의견들이 충분히 공유가 되고, 공유하는 과정에서 수정되거나,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거나 하는 '과정'이 마련되었을까. 우리는 우리로서 살아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