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아프지만 곁에 두기로 했다.

'열한 계단'을 읽고

by 김대영

좋은 책을 구분하는 나만의 기준은 간단하다. 생각이 많아지는 책이다. 생각이 많아져 머리와 가슴이 뜨거워지는 책이다. 최근 읽은 책들은 나에게 그러한 경험을 시켜주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좋은 책을 만났다. 사실 이 책을 구입한지는 꽤 시간이 흘렀다. 당시 그저 채사장(책의 저자)이라는 사람의 글에 매료되어 작가의 이름만 보고 구입한 책이다. 사실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무엇을 이야기할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책장에서 이 '열한 계단'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제목 위에는 이러 문구가 쓰여 있다.



나를 흔들어 키운 불편한 지식들
책 [열한계단] 표지


채사장 작가의 책은 역시 좋다. 다루기에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을 적절한 이미지와 특유의 재치를 통해 간결하게 풀어낸다. 사실 이 책의 내용도 그다지 간단한 내용은 아니다. 작가의 인생을 도구삼아 궁극적으로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자아 탐색까지 도달하는 책이다. 이 책은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정신의 성숙을 이야기한다. 즉 정, 반, 합이라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성장한다고 설명한다. '정'이라는 편한 생각에 '반'이라는 불편한 지식이 더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합'이라는 결과를 도출해 낸다. 그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성장이고 하나의 계단을 오르는 과정이다. 이 책은 작가 자신의 성장 과정을 열한 단계로 표현한 책이다.

책은 우리가 살면서 접할 수 있는 여러 지식과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우리가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문제를 작가도 같이 경험하는데, 나에게는 참 많은 공감이 되었다. 책에서 한 소년은 문학을 시작으로 종교, 철학, 과학, 이상, 현실, 삶, 죽음, 나, 초월이라는 계단을 밟게 된다. 계단을 오르며 그 소년은 넘어지고 다치기도 하고 우연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그저 우리 인생과 이 책은 많이 닮아 있다.


책을 읽으며 가장 공감된 부분은 바로 이상과 현실이라는 계단이다. 종종 고민한다. 이상적인 삶과 현실적인 삶 나는 과연 그 어디에 있을까? 학생 때의 나는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줄 알았다. 대학시절은 그 날개를 정비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과정인 줄 굳게 믿었다. 그래서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선배들이 와서 이야기하는 신세한탄은 내 세상에는 없을 지상의 고민들이었다. 나는 그만큼 자만했고 이상적이었다. 이 세상에서 나는 가장 멋진 날개를 가진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졸업을 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내가 멋지게 만든 날개가 현실에서는 그저 신경 쓰이게 거치적거리는 존재라는 것을....

현실에서는 상대방의 말을 꼬지 않고 들을 수 있는 귓구멍과 내 뇌와 연결되어있지 않은 입이 있어야 했다.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하는..) 그렇기에 내 날개는 더욱이 귀찮게 여겨졌다. 사소한 행동에도 크게 펄럭이는 내 날개는 점점 그 매력을 잃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 자랑스럽던 날개가 부끄러워진 것이다. 날개가 전부였던 나의 현실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여행을 통해 내가 배운 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이 삶이었다. 절에는 붓다가 아닌 주지스님이 있었고, 교회에는 신이 아니라 신자들이 있었으며, 시장에는 상품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은 형이학적인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는 공간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체적인 삶으로 가득했다. 나는 그 자명하고 단순한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한 계단 136p]


글을 읽고 느낀 것은 내 지난 자만에 대한 반성이었다. 내 삶은 구체적인 사실이었다. 내가 있는 이 땅은 이상 아닌 현실이었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 날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날개를 꾸미고 있을 때 다른 이들은 현실에서 튼튼한 운동화 끈을 묶고 있었다. 그들은 뛸 준비를 했던 것이다.

현실을 살고있는 사람들

시간이 지나, 나도 남들처럼 운동화 끈을 묶고 있다. 아직은 초라한 운동화고 아직 끈을 묶는 것도 어색하지만 그래도 남들처럼은 해야지 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의 현실과 이상은 부딪혔고 내 이상은 현실에게 완패한 듯 보였다. 그렇게 구체적인 삶에서 아둥바둥하던 중 우연히 거울을 봤다. 초라했다. 날개가 없어 허전했다. 날개의 빈자리는 느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허전하다 못해 시큰했다. 그리고 날개가 화려했던 그 시절을 회상한다. 참 멋있었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듯한 멋지고 큰 날개가 부러웠다.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책을 읽는다. 미친 듯이 읽는다. 지식을 얻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멋지고 큰 날개를 가진 때를 기억하기 위해 읽는다. 책을 읽으면 시큰한 내 날개 자국을 위로받는 느낌이다. 어루 만져주는 느낌이다. 이 [열한 계단] 책이 그랬다. 내가 했던 고민들, 생각들이 나만 그런 것이 아니야 라고 공감해주는 책이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위로받았던 문구다.


이상과 현실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한 사람의 삶 속에서 통합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만들어내는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주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열한 계단 322p]


나는 치열하게 살았다. 그렇게 멋진 날개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날개는 필요 없었다. 그렇게 나는 고통스러웠고 그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끔은 날개가 거추장스럽고 귀찮을지도 모르지만 난 절대 그 날개를 떼어내지는 않기로 했다. 조금은 아프지만 곁에 두기로 했다. 지금은 두발로 걷는 것을 배운다. 나는 곧 남들처럼 뛰어다닐 것이다. 내가 지금 어떤 계단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내 멋진 날개는 현실에서 뛰어다니는 나를 위해 멋지게 비상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다음 계단을 향해 오른다.


" 조금은 아프지만 곁에 두기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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