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 Nov 13. 2019

어디서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로 끝나는 이 질문.

# 2019년 초가을.


어디서 살 것인가. 요 몇 달 골몰했던 주제다. 전세 기간 만료가 석 달 앞으로 다가왔고, 인규 초등학교 입학을 2년 정도 남_겨놓고 있다. 인규가 다니는 우리 회사 어린이집은 만족도가 100%인 대신, 마지막 1년, 7세 반 과정이 없다. 마침 남편도 새 시작을 하게 되는 해인지라, 오래전부터, 내년쯤엔 오래 살고 싶은 동네에 발을 들여놓자고 마음먹었다.


서로 원하는 것부터 얘기했다. 나는 단독은 무서워서 싫지만 테라스가 있는 집에 살고 싶고, 혁신초등학교가 좋아 보인다고 했다. 남편은 이왕이면 투자 가치가 있는 동네면 좋겠다는 의견을 더했다. 사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우리한테 '경고'를 준 면이 있다. 나름 역세권에, 약 10년 전 분양한 아파트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시세가 비슷하다. 우리한테 두 번 전세를 연장해 준 집주인은 '애기 엄마, 집은 신중하게 사야 해요'라고 했다. 깔고 있는 집 가격이 팡팡 튀길 바라진 않지만 최소한 뒤쳐지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이런 마당이 있는 집도 보고왔다. 아직도 탐나지만 결정은 쉽지 않다.


그렇게 몇 군데 집을 보러 다녔는데. 보면 볼수록 답이 안 나왔다. 우선 내가 원하는 환경이, 인규한테 '좋은' 환경인지 확신이 안 섰다. 대단지 아파트에 살 생각 하면 숨이 턱턱 막히는데, 대단지 아파트만큼 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이 없다고들 했다. (존경하는) 인규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 조언이 가장 굵직했다. '저도 아이 둘 키우는 워킹맘이잖아요. 태권도라도 하나 보내려면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이 좋아요. 제가 직접 데리고 다닐 수 없으니까요.' 현실이었다. 숲 가까이 테라스 있는 집들은 학교에서 좀 떨어진 곳이 많았다. 내가 매번 데리고 다닐 형편도 아닌데. 게다가 인규는 5살인 지금도 어린이집이 끝나면 회사 앞마당에서 어린이집 친구들과 한 시간씩 킥보드를 타고 논다. 물론 인규가 흙과 돌멩이만 있으면 잘 놀긴 하지만, 친구들과 가까이 어울려 사는 환경이 더 우선순위긴 하다. 크면 클수록 친구가 더 소중해질 터다. 건너 들은 이야기 중에, 단독주택 살고 싶어서 교외 집을 구했는데, 애가 대단지 아파트 놀이터에서 친구들이랑 놀고 싶어 해서 한 시간씩 차를 타고 아파트를 향한다는... 무시무시한 스토리도 있었다.  


어떤 학교가 '좋은' 학교 인지도 판단이 안 선다. 나는 강북 한 동네에서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시작해 고등학교까지 나왔는데. 나는 나름 잘 컸다고 생각하지만, 순간순간 아슬아슬한 장면들이 떠오른다. 얼마 전 장례식장에서 만난 중학교 친구들은 하나같이 '우리는 참. 어찌어찌. 어떻게, 잘 컸어 참??'이라 말하고 서로 맞장구를 쳤다. 우리 모두 아슬아슬한 환경에서 이런저런 고비를 넘어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공감대가 있는 거였다. 그런데 인규가 그 고비들을 똑같이 잘 넘겨줄지 모르겠다. 물론. 어디서 아이를 키우든 비슷한 고비들은 생길터고, 그걸 극복하는 건 인규 몫이라고 생각하지만, 위험(?) 요소를 최대한 줄여주고 싶은 게 내 솔직한 마음이다. 대단지 아파트에 살면서 단지 인근 초중고를 졸업한 내 남편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점도 작용했다. (뭐, 나보다 재미는 좀 없었을 거 같긴 하지만...ㅎ)


대학생 때 신문기사를 보고 엄마한테 문자 보냈던 기억이 난다. 고교별 학업성취도 이런 걸 참 자주 내보내는 모 매체 기사였는데. 내 인생을 살아온 3개 지역이 '학군 하위 3개' 명단에 떡하니 올라있었다. '엄마. 이것 좀 보소.' 라며 엄마를 괴롭힌 다음 '나는 내가 알아서 잘 큰 것'임을 재차 주장했다. 최근 가족 모임 때도, 해묵은 같은 얘기를 꺼내 들며 내가 '맹모삼천지교'를 운운하자, 사촌 오빠가 '맹모삼층지교'로 맞받아쳤다. 우리 엄마가 비록 교육에 좋다는 환경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닐 만큼 여유 있는 삶을 살지 못했지만. 큰언니를 키우고 둘째 언니를 키우며 쌓인 경험들로 나는 시행착오 없이 상대적으로 잘 컸다는 게 오빠 주장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우리 엄마는 애 셋을 키우면서 먹고사는 문제로 '부재'했지만. 그 빈자리를 큰언니가 채워줬다. 나는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둘째 언니와 언니 친구들을 따라다니면서 배운 게 더 많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그래서 대체 어디서 살 것인가.


답을 못 냈다. 이 와중에 안쓰러운 우리 주인아주머니가 '그대로 살람 사시던가요'라고 해서, 그냥 지금 집에 산다는, 안정적인 선택지까지 더해졌다. 어디서 살 것인가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닿아 있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답을 찾는 일은 몇 달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인규를 어떤 환경에서 키울 것인가에서 '환경'은. 삼천지교 아닌 삼층지교마냥, 꼭 물리적 환경만을 의미하는 건 아닐 것이다. 오늘도 집을 하나 보러 가기로 했지만. 결정은 못할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