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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 Aug 03. 2020

나는 왜 엄마한테 '지랄'하는가

기어코 겪어봐야 깨닫고 마는 이야기.

지난 5월부터 제목만 써 놓고 시작도 못한 글이 있다. 

<나는 왜 엄마한테 지랄하는가>


더 정확히는 <나는 왜 엄마한테'만' '마음 놓고' 지랄하는가> 정도가 되겠다. 처음 만난 사람한테는, 회사 사람들한테는, (심지어) 남편과 아이한테는 세상 친절하게 대하는 내가. 왜 엄마한테는 맘껏 못되게 구는지 탐구해보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제목만 써 놓고는 내가 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어, 한 줄 시작도 못한 글이었다. 


그리고는 지난 삼 개월 동안 엄마가 아팠다. 예전부터 자꾸 머리가 아프다고 하셔서 별생각 없이 겸사겸사 회사 건강검진을 신청했는데, 지독한 놈이 발견돼 무려 전신마취 수술까지 받으셨다. 그 '겸사겸사' 라는게... 다른 곳 섭외 전화를 돌리다가 문득 생각나서 검진센터에 전화해봤는데- 코로나 19 때문에 건강검진센터에 사람이 없어서 5월 중 검진을 받으면 무언가 검사 하나를 더 추가로 해준다는 등의-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었다. '이왕 추가 검사를 하나 해준다니...' 싶어서 바로 예약을 잡았고. 그 '보너스 추가 검사'에서 하마터면 엄마를 잃게 할 뻔 한 '지독한 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불과 지난 석 달 사이 일이다. 




엄마가 치료를 받느라 안 계신 동안 글을 시작할 단초를 찾아냈다. 내 '지랄'의 상당 부분은 '나 좀 돌봐줘'와 같은 말이었다. 약 2년 전, 엄마는 큰언니 가족을 돌보기 위해 나를 이모에게 '외주' 주셨다. 서로 자기 애를 봐달라는 (결국은 그러면서 나도 좀 돌봐달라는) 딸내미들의 요청에, 엄마가 내린 가장 합리적인 결단이었다. 엄마는 아들 둘인 맞벌이 부부 언니네를 따라 지방으로 내려가셨고, 역시 맞벌이 부부인 우리 집에는 이모(그 '이모' 말고 진짜 우리 이모)가 와주셨다. 이모의 돌봄이 시작된 이후 내 삶은 정말이지 윤택해졌다. 집에 만랩 주부가 있다는 건- 바닥이 늘 매끈하단 거고, 퇴근하고 집에 오면 따뜻한 밥이 있다는 거고, 냉장고에는 시원한 보리차가 채워져 있다는 거였다. 이모 덕분에 나는 정치팀에 가서도 아이 걱정, 집 걱정 없이 일만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래 놓고서도, 난 늘 엄마한테 화살을 쐈다. 엄마의 돌봄을 큰언니가 차지했다는 걸로 엄마를 괴롭힌 거다. '내가 아닌 큰언니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엄마를 괴롭힌 거다. 차라리 말이라도 '엄마가 왜 그렇게 하셨는지 알면서도 서운해요' 라거나. '나도 내가 왜 이렇게 엄마한테 짜증을 내는지 모르겠어요'라고 얘기했음 그나마 나았을 텐데. 나는 엄마한테 수시로 그냥 투덜거렸다. "엄마는 말을 왜 그렇게 해. 왜 그런 옷을 입어. 왜 그 가방을 메고 다녀. 왜 그렇게 피곤하게 다녀. 나 이거 싫어하는데 왜 사 왔어. 요즘 누가 이런 걸 써." 이런 식으로. 아니, 이딴 식으로. 


그 긴 시간 (내 지랄을) 참아 낸 우리 엄마는 지난 5월부터 '드디어' 우리 집에 오시기로 하셨다. 설국열차처럼 돌아가는 엄마의 돌봄 노동이 잠시나마 멈춘 건 '겸사겸사' 받은 건강검진 결과 때문이었다. 




좀처럼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뒹굴거리던 6살 뀨가 이미 잠들어 꿈 입구까지 가 있는 나를 (기어이) 불러낸다.  

"엄마. 등 좀 긁어줘."


등을 긁어달라. 솜방방이(=면봉)를 가져와 '귀 솔솔'을 해달라. 다리 좀 만져달라-가 잠들기 전 주된 레퍼토리다. 아직은 내 한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종아리가, 그 종아리에 통통하게 살이 붙은 게 무척 귀엽고. 두세 번 쓱쓱 움직이면 되는 자그마한 등짝이 무척 사랑스럽고. "아니 좀 더 아래, 아니 그 옆에. 응 거기 긁어줘"라는 말이 너무나 이쁘지만. 그렇지만. 


............팔이 아프다. 이제 그만하고 나도 좀 자고 싶다. 

 

나는 내 자식 등 긁는 건 팔이 안 아플 줄 알았다. 왜냐. 우리 엄마는 팔이 안 아팠으니까. 우리 엄마는 내가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늘 번쩍 일어나 다리를 주물러주셨고 등 좀 만져달라고 하면 내가 잠이 들 때까지 등을 어루만져 주셨다. 부끄럽지만 아주 어릴 때 일만이 아니다. 기자 초년병까지도 엄마는 밤새고 지쳐 쓰러져 자는 내 방에 들어와 내 몸 이곳저곳을 살피고 어루만져주셨다. 내가 받은 사랑이 그런 거여서, 그냥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내가 내 자식을 낳고 그 아이가 6살까지 커서 다리를 조물조물해주기 전까지는 '엄마'는 팔이 안 아픈 줄 알았다.  


엄마는 2주 넘게 입원해 몸의 일부를 제거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엄마는 2주 넘게 입원해 몸의 일부를 제거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별 다른 말도 없이. '못 돌아오는 줄 알았다'며 '꿈을 꾸고 온 것 같다'며 다시 묵묵히 나와 우리 가족을 돌봐주기 시작하셨다. 내 지랄은 이제 멈췄다. 30대 후반에 이제 곧 '두 아이'의 엄마가 될 예정인데도 아직도 이렇게 철이 없는 나란 존재는, 엄마를 잠시나마 잃고 나서야 엄마를 향한 생떼를 멈춰 설 만큼 (고작 그만큼) 성장했다. 정작 엄마는 크게 아프고 난 뒤 더욱 깊어지신 느낌이다. 우리 엄마를 따라가려면- 나는.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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