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공놀이의 꽃은 피구였다. 때는 바야흐로 <피구왕 통키> 전성시대. 지금도 BTS 노래 가사는 모를지언정 피구왕 통키 주제곡만큼은 예고 없이 완창 할 수 있을 만큼 그 시절 우리에게 피구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나마 피구가 있었기에 조금이나마 운동장에 나가 뛰어놀았다. 다만, 나는 공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체구가 작고 힘이 약해 공격수로는 꽝이었고 그나마 수비 때 요리조리 도망은 잘 다녔는데, 뭔가 프로 느낌으로 휙휙 피한다기보다 겁에 질려 공을 필사적으로 피해 다니는 수준이었다. 그때도 공격수가 던진 공을 한 번에 척! 받아내 공수를 바꿔내는 운동 히어로들이 있었는데 나는 늘 그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피구만 내리 몇 년을 한 끝에, 나는 공으로 하는 운동에 흥미를 잃게 돼버렸다.
중학교 때는 1년에 한 차례 열리는 체육대회가 연중 가장 큰 행사였다. 반별 발야구 시합이 있었던지라 기를 쓰고 연습을 했다. 문제는 운동장이었다. 유치원-초등학교-여중-일반계 여고-상업계 여고 이렇게 5개 학교가 한 부지에 꽉 들어차 한 운동장을 공유했다. 초등학교 남자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면 발야구 코트 한 개조차 그리기 힘들었다. 동네 무서운 누나들로 변모해 '초등학생들아 꺼져!'라고 해보자... 는 아이디어도 나온 적이 있었는데 '꺼져'라고 할 때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 실행해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갈등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체육대회를 앞두고 한 달 여. 서로 겹쳐가며 발야구 코트를 그리고 자존심을 건 훈련을 했지만, 대회가 끝나면 운동도 끝났다. 또 훈련과는 상관없이 그 반에 운동 잘하는 애가 몇 명이냐에 따라 승부는 결정됐다.
내 인생에서 가장 운동(?)을 많이 했던 건 중3 때였다. 우리 반에 와리가리 열풍이 불었다. 듣기만 해도 왜색이 짙은 이 놀이는 양쪽에 베이스를 두고 테니스공을 주고받는 사이 양쪽을 '왔다 갔다'하며 점수를 얻는 방식인데, 학교 로비 기둥이 와리가리 성지였다. 와리가리에 푹 빠진 중3 여학생들은 교복 치마 속에 체육복 바지를 올려 입고(치마 아래로 바지가 보이면 선생님한테 혼났다) 종이 치기만을 기다렸다. 종이 울리면 곧바로 로비로 뛰어내려 가는 식으로 매 쉬는 시간마다 기둥 사이를 뛰어다녔다. 쉬는 시간은 총 10분, 로비로 뛰어갔다 교실로 뛰어 돌아오는데 왕복 2분을 쓰고, 나머지 8분간 와리가리를 즐겼다. 와리가리를 할 생각에 수업이 끝나기 전, 매 시간 47분부터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다. 다시 생각해도 참 즐거웠던 시절이다.
농구를 제대로(!) 해본 건 고등학교 때가 처음이었다. 고1 체육 수행평가가 하필 농구였다. 나뿐 아니라 같은 반 여고생 대부분이 농구공을 몇 번 만져본 적도 없었던 상태였는데 시합을 치러야 했다. 체육 선생님은 고민 끝에 각 팀마다 체대 입시 준비생을 한 명씩 배치했다. 다른 여자애들은 농구를 한다기보다 같은 팀 체대 준비생을 잘 찾아내 공을 건네주기에 급급했다. 몇 번 연습 시합을 지켜본 뒤 선생님은 더 이상 드리블을 요구하지 않게 되셨다. 그래도 시합에 나선 우리는 매번 진지했고 나름 공을 바닥에 튀겨가며 움직이려 시도했다. 그렇게 우린 진지했으나... 실상 농구이기보다는 육탄전에 가까웠다. 시합이 끝나면 손등과 팔에는 서로를 할퀸 자국이 가득했다.
살림이 빠듯해 예체능 학원을 다녀보지는 못했다. (아, 80년대 여자아이의 상징, 피아노는 잠시 다녔었는데 선생님이 자꾸 손등을 자로 내리쳐서 일찌감치 관뒀다.) 내가 겪은 운동은 대체로 이게 다다. 나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운동하지 않는 인간- 無動人으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