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와, 축구를 생각한다.
내가 축구를 했다면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6년 전, 첫째가 아들인 걸 알게 됐을 때 꽤나 고민이 깊었다. 나는 언니밖에 없고, 여자로 살아본 경험밖에 없는데, 아들은 대체 어떻게 키워야 하는 걸까 가늠이 안 됐다. 정확히는 어떻게 키워야 '좋은 남자 사람'으로 크는 걸까 그림이 안 그려졌다. (어차피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남편을 제외하고) 내 주변에서 가장 좋은 남자 사람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선배, 아들한테 제가 뭘 해줘야 할까요' 뭐 이런 질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배는 1초의 망설임 없이 바로 이렇게 답했다.
"꼭 축구 교실에 보내라."
축.구? 의외의 답이었다. 내가 아는 바 그 선배는... 축구랑은 거리가 멀었다. 선배가 축구하는 모습은 지금도 상상이 잘 안 된다. 그냥, 뭔가, 축구랑은 안 어울린다. 게다가 선배는 LG 트윈스 팬이다! 축구보다는 야구파에 가까운 선배가 굳이 콕 집어 축구라니 이상하다 싶었는데, 선배의 얘기를 들으니 이해가 됐다. '축구를 못 하는 남자의 삶은 너무 고단하다'는 거였다. 반대로 축구만 잘해도 학창 시절을 보내기도, 군대도, 심지어 회사에 가서도 수월하다는 게 선배 설명이었다. 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우리 회사는 기자협회에서 주최하는 체육대회 축구시합에 신입 남자 기자들을 대거 동원하는데 단 한 번의 동원 훈련으로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는 걸 지켜봤다. 축구를 잘하는 내 동기는 두고두고 '될 놈'으로 칭찬받으며 모든 자리마다 불려 나갔다. 그래서 본인이 행복했느냐... 는 별도의 문제지만 단번에 조직에 흡수된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반면 축구는 80년대생 여자인 나와는 이상하리만큼 거리가 멀었다. 고등학교 체육시간에 농구 시합도 해보고 심지어 투포환까지 던져본 적이 있는데 (내가 사랑하는 우리 고등학교는 체육 수업에 늘 진심이었다.) 축구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내 인생에 축구라는 단어가 그나마 중요했던 건 2002년 월드컵 정도인 것 같은데 당시 누구나 그랬듯 축구 광풍 분위기에 꽤 휩쓸리긴 했지만 '나도 축구 한 번 해볼까?'는커녕 끝내 '오프사이드'를 이해하지 못하고 끝났다. 요즘은 축구경기 보는 걸 좋아하는 여성들도 많아졌다지만 그렇다고 축구를 즐겨하는 여자들이 많아지진 않은 듯싶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축구가 이상하리만큼 중요한 존재인 딱 그만큼, 여자들의 세계에서 축구는 존재 자체가 거의 없다. (둘 다. 참... 이상하다.)
이제와 축. 구. 를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다. 내가 어릴 때부터 축구를 자연스럽게 배우고 즐겨왔다면 지금보다 훨씬 몸을 쓰는데 익숙하지 않았을까- 싶다. 수많은 운동 중 왜 하필 축구인가. 축구는 기본 체력이 중요하다. 공이고 뭐고 일단 전후반 90분을 뛰려면 운동하는 몸의 기본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공이고 뭐고 일단 뛰어다니는 것만으로도 기본 운동이 된다. 또 축구는 공만 있으면 된다. 언제 어디서든 공만 있으면 즐길 수 있는 운동이라니, 멋지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축구는 집단 경험이다. 여럿이 함께 뛰면서 즐기는 운동이니 그만큼 더 즐겁게 경험을 공유하며 체력까지 기를 수 있다. 어릴 때 'oo야~ 나와서 축구하자~'라고 해본 경험이 있었다면. 학창 시절 '야, 짜증 나는데 딱 30분만 뛰고 오자'라고 해본 경험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습관적 운동'에 가까운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뀨가 다니던 어린이집은 5세, 6세 때 주 1회 아이들 모두가 함께 잔디 축구장에 나가 축구를 배웠다. 그런데 규모가 훨씬 큰 유치원으로 옮겼더니 발레와 축구 수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일찌감치 선배의 지침을 받은 나는 망설임 없이 축구를 선택했다. 그런데 수업 사진을 보니 여자 아이들은 모두 발레를 하고 남자아이들은 모두 축구를 하고 있었다. 작년에는 여자아이 한 명이 축구를 선택해 배웠었는데 올해는 아무도 선택을 안 했다고. 또래 영향력이 절대적인 아이들에게 '축구할래, 발레 할래'는 사실 질문이라 하기도 민망하다. 여자아이들도 같이 축구를 하고 뀨도 발레를 배우면 좋을 것 같다고, 내년에는 성별로 운동 수업이 나뉘지 않도록 고려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레 말씀드렸다. 더 어릴 때부터 더 자주 더 자연스럽게. 여자 아이들이 축구를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몸을 더 자유롭게 잘 쓰고 습관적으로 운동하는 여자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더하여. 축구를 잘 못하는 남자들 삶도 덜 고단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