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말은 무의식 속에 많은 정보를 담는다.
쉴 틈 없이 쏟아내는 참새 떼의 재잘거림 같은 가벼운 수다나 사람들 생계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자의 무거운 말이라도, 당사자도 모르게 자기 이야기를 떠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때 연애에 재주가 없는 사람을 놀리는 말로 유행했던 ‘이번 생엔 틀렸어.’ 나 ‘내 인연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나봐.’라는 말이 떠돌았다.
웃고 떠들던 자조적인 농담으로 현생의 자기 신세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불만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인간의 언어는 생각보다 강력한 힘을 담고 있다.
쉬이 내뱉고 주워 먹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 한 번 뱉고 나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물과 같은 것이다.
오죽하면 고대로부터 우주의 힘을 쓰는 신비한 힘이 오직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로 그 힘을 사용했겠나.
언어는 시간과 사물, 사람,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모든 운명과 에너지를 속박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재밌고 가볍게 그린다고 세상 모든 일이 마냥 가볍지 않듯이, 말, 언어의 힘은 현대인이 무시하는 것만큼 가볍지 않은 것이다.
현세는 오랜 역사를 살며 사람들이 내뱉어 놓은 말들로 이미 어지럽다 못해 포화 지경이다.
끝없는 모순과 그 모순에서 비롯된 집착과 집념이 끈끈한 타르처럼 우리의 영혼에 들러붙어 눈을 멀게 하고 코를 막으며 귓구멍을 틀어막아 꼼짝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영혼부터 썩어 들어간다.
오염된 영혼은 병이 들고 다시 사회에 새로운 집착과 집념을 만든다.
타인을 상처 입히고 혼란과 혼돈을 쏟아내며 새로운 구속과 굴레를 덮어씌운다.
역병처럼 번지는 혼탁한 기운이 끈끈이처럼 사람들의 맑은 영혼을 굴레 속에 구겨 넣어 새로운 고통의 사이클을 세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못하고 그 사이클에 말려 들어간 자들은 또 눈물을 흩뿌리고 슬픔을 가득 채워 사회에 새로운 억한의 반원을 토해낸다.
끝없는 고통이 메아리치고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메아리는 영혼을 마비시킨다.
그렇게 현재의 사회에 이르러 정신병이 뿌리내린다.
작금의 이 고통스러운 사는 모양이 본래 삶이라며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본래의 삶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 채, 그저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삶이라며, 바닷물을 들이켠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정신병원은 매년 늘어나고 영혼의 갈증으로 비롯한 듣도 보도 못한 병명을 지어내며 거짓 명예로 만든 왕관을 쓴다.
영혼의 병으로 비롯한 육신의 병은 근본이 없다.
정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인간은 산송장의 길로 접어든다.
살아만 있으면 해결될 거라는 자위에 100년, 300년, 500년, 1000년을 짐승처럼 살아간다.
무너진 육신에서 나온 에너지는 인간을 바로 세울 수 없다.
우습게도 이 모든 사건의 실마리는 운명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비웃어 온 말이란 말인가, 운명.
과학 발달과 이성의 시대에 운명이라니, 순진해 빠진 말 아닌가.
멍청한 이들이나 운명이라는 말을 믿는 거라고 조소하는 이들 앞에 영혼이 발가벗겨진 채로 조롱당해야 했던 그 말이다.
에너지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자연스럽게 흘러야만 그 조화를 제대로 이룰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인간이 자연보다 똑똑하고 훌륭해 인연조차 자신들이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는 지경이 되었다.
과거 도태된 생물종의 최후는 어떻던가.
과연 대자연 어머니가 그런 생물을 살려두는 경우가 단 한 번이라도 있던가.
한 번 더 상기해 보자.
사회에 자조적으로 유행하는 말 중에 자신의 인연이 이 세상에 없어서 혼자라는 말이 있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단어, 노래, 어구, 문학, 드라마, 유행하는 물건은 허투루 생기는 것이 없다.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길을 잃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할 시기에 영양분이 갈 길을 잃었다.
제 짝을 만나지 못한 영혼이 수정하지 못하니 당연히 제대로 나왔어야 할 열매도 없다.
열매를 맺고 다음 세대로 전달해야 할 영양분이 땅바닥에 떨어져 썩어나간다.
파지가 된 열매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사회는 그마저 받아줄 여력이 되지 않아 곳곳에서 이상 현상이 일어난다.
이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이다.
장엄하고 심각하게 사회니, 영혼이니, 정신이니 늘어놓아 당황스럽겠지만.
하지만 흔히 알고 있는 로맨스는 아니다.
눈을 떴으나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나 들리지 않으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는, 가여운 영혼을 위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