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위하여(For the Story)

제 1장 이번 생엔... #1 눈을 감으면 도시는 물에 잠긴다

by 단영화

부드럽게 감싸는 전신의 압박감, 추라도 달아놓은 듯 천천히 침전한다. 먹먹한 귓가에 바스라지는 물결 소리가 스친다. 익숙한 듯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천천히, 아주 느리게 귀를 감싼다. 사지에 매달린 묵직한 저항감, 자연스럽게 몸을 구부려 동그랗게 말았다. 아주 편안한 기분이었다. 오래된 기억 속 그리운 어느 날의 추억처럼 따뜻하고 익숙했다. 얼마나 오래 깊숙이 흘러들었을까. 움직임이나 시간이 무뎌져 우주에서 유영이라도 하는 듯 감각이 없다. A는 동그랗게 말았던 몸을 천천히 펼쳤다. 눈을 가린 두 손을 양쪽으로 길게 뻗었다. 느긋하게 흐르는 물결 사이로 부서지듯 반짝이는 시퍼런 빛이 눈을 자극했다. 놀랍게도 A는 지금 깊은 물 안에서 자유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거대한 수조에 홀로 남은 물고기처럼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A와 한없이 흐르는 깊고 넓은 물이 전부였다.


음- 으음- 흠-


살짝 들뜬 기분의 A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입과 코로 크고 작은 공기 방울이 흘러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위로 올라가는 듯, 이리저리 사방으로 흩어지는 듯 물거품도 정처 없이 흘러갔다. A는 멀어지는 물거품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아주 작아서 거의 점이 될 때까지 A의 시선은 집요하게 뒤를 쫓았다. 그러다 완전히 보이지 않자, 흥미를 잃고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랫소리는 산봉우리의 메아리처럼 반복해서 A를 맴돌았다. 커다란 스피커 앞에 서 있기라도 한 듯 심장이 두근두근 댔다.


꾸르륵- 꾸륵-


위를 바라보던 A는 몸을 돌려 어디론가 헤엄쳤다. 팔과 다리를 널찍하게 벌리고 오므리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움직임이 탄력을 받아 조금씩 빨라졌다. 어두컴컴하기만 한 시야에 간혹 별빛처럼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폭풍 속 등대의 빛처럼 A는 반짝이는 빛을 의지 삼아 방향을 틀었다. 상체를 돌리면서 다리를 바쁘게 퍼덕였다. 큰 포물선을 그리며 몸의 위치를 바꾸자, A는 다시 매끄럽게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이마와 뺨을 스치는 물결의 맥박이 개선장군의 북소리처럼 힘차게 요동쳤다. 노로 젓는 배의 규칙적인 움직임처럼 반복적인 리듬이 흥겨워 A는 덩달아 신이 났다.


추르륵-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A는 팔다리의 움직임을 멈췄다. 다리를 곧게 펴고 두 팔을 번쩍 들어 빠르게 아래로 향했다. 밑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기묘하면서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바람 대신 물결 따라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평소 보던 풍경에 기묘한 느낌을 더했다. 누가 슬로우모션을 걸어놓은 듯 얹어놓은 무게감에 느리게 쓸려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로수 사이 도로 근처 익숙한 형태의 집들이 늘어섰다. 그중에 가장 익숙한 집이 눈에 들어왔다. 10년이 넘도록 살면서 추억이 가득한 그 집은 바로 A의 집이었다. 자기 전에 창문을 열어뒀던 건지, 3분의 2쯤 열린 창문 틈으로 거실이 보였다. 제법 큰 창문은 성인 2명이 들락날락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A는 창가로 내려가 열린 창문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거실에는 대부분의 일상과 생업 활동 지역인 3인용 소파와 바닥에 깔아놓은 부드러운 면 소재의 카펫, 재택근무 시 사용하기도 하고 밥상 대신 사용하는 협탁과 지난 가구 세일 때 인터넷 구매로 장만한 플라스틱 책장이 옹기종기 놓여 있었다. 일이며 휴식을 대부분 거실에서 하는 A는 그 장면이 퍽 푸근했다.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소파로 푹 고꾸라졌다. 익숙한 주거지의 냄새에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물로 가득 찬 거실과 현관 바로 옆의 주방, 주방 옆의 화장실,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침실과 옷방까지 집 안 역시 밖과 다르지 않았다.


휴-


깊은 한숨을 내쉬자, A의 코와 입에서 비눗방울 기계처럼 물보라가 요동쳤다. A는 매번 겪는 일이지만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줄 사람도, 하소연할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무척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원인도 이유도 알 수 없으니 별수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A는 무기력하게 소파에 누워 팔다리를 버드나무처럼 추욱 늘어뜨렸다.


어느 날 갑자기, A의 세상은 천지개벽한 듯 뒤집어졌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던 일상일 뿐이었다. 일생을 무탈하고 무난하게 살았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겠는가. 사이 좋은 부모님 밑에서 흔해 빠진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나, 성실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중상위권 성적으로 적당한 대학을 졸업한 뒤, 운 좋게도 적당한 회사에 취업해 5년 정도 경력을 쌓고 직접 일감을 받아 일하며 먹고 사는 정도의, 적당히 운이 좋은 적당한 인생이었다. 놀라울 것도, 어려울 것도, 없던 그야말로 병풍과 같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살다 갈 수 있는, 신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바로 그런 무난한 삶의 주인공이었다. 오죽하면 크게 욕먹을 일이나 미움받을 일도 없이 살 수 있었을까. 사회에서 명예나 권력을 쥐고 타인의 인생을 좌지우지한다거나 상상도 하지 못할 부를 축적해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인생은 빛 좋은 개살구다. 보기보다 져야 할 책임이 크고 먹여 살려야 할 입이 많아 최상위에 군림하는 듯 보여도 짧으면 80년, 길면 100년 자발적 노예가 되어 인정과 칭찬을 연료 삼아 살다가는 인생이 되기도 한다. 물론 알면서도 좋아서 한다면 그 또한 복 받은 인생이고 신에게 사랑받은 영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대부분은 어차피 군림할 수 없으니 최대한 모난 돌이 되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고난이 존재를 잊어버리고 피해 갈 수 있다. A는 어디서 걸렸는지 고난과 역경의 눈에 띄어버린 것이다.


슬픈 눈으로 무척 익숙한 거실 천장의 얼룩을 집중해서 노려보았지만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혹시 꿈인가 싶어 손가락에 힘을 줘 양 볼을 꾸욱 꼬집었다.

아악- 아야...!


역시 무척 아팠다. 얼얼한 볼을 손바닥으로 살살 돌려가며 달랬지만 심란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꾸르륵-


창밖에서 흘러들어온 작은 물보라가 비웃듯이 A의 뺨을 살포시 스쳐 지났다. 작은 움직임을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눈알이 바쁘게 물결을 쫓았다. 들릴 리 없는 비웃음이 들리는 듯 작고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귓가에 환청으로 맴돌았다.


크앙-!


순간 뱃속 깊은 곳에서, 모종의 분노가 치솟았고 눈에 불꽃이 튀어 올랐다. 뺨을 스쳐 시야에서 멀어지려는 물보라를, 입을 크게 벌려 재빠르게 ‘앙‘하고 물어뜯었다.

크윽...!


부스러진 물결은 허무하게 이 사이로 빠져나갔다. 얼마나 세게 앙 다물었는지 골이 흔들리고 턱 근육이 뻐근했다. A는 괜스레 허공에 가득 찬 물을 째려보고 하관을 문지르며 으르렁댔다.

으아-!!! 약 올라-!!!!!!!


답답하고 짜증이 치솟아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신경질 난 A는 허공에 대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지만, 그마저 물의 저항에 밀려 나무늘보처럼 행동이 늘어졌다. 손발에 타격감조차 전해지지 않자 분한 마음이 갈 길을 잃었다. 얼마간 허우적대며 분노를 표출하던 A는 지친 듯 조금씩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헉..! 헉..!


외로운 혼자만의 싸움에 지친 듯 소파 위로 다시 추욱 늘어졌다. 소파 밑으로 늘어진 몸이 미끄러지면서 떨어져 내리자, A는 얕은 물살에 밀려 천천히 두둥실 떠올랐다. 물결이 토라진 A의 기분을 달래주기라도 하는 듯 둥실둥실 떠밀려 올랐다.


으아앙-!!!!


A는 물결에 얼굴을 파묻고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허공에 엎드린 상태로 얼굴을 감쌌다. 눈물인지 물방울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방울져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는 고요 사이 A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돌림노래처럼 메아리쳤다. 파동이 몸을 흔들고 지나갈 때마다 덩달아 내장도 함께 흔들렸다. 끝없는 허무와 공허 속에 완벽하게 홀로 남았다는 서러움과 마음에 안 드는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없다는 짜증이 올라왔다. 메아리가 끝도 없이 반복됐다.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멀리서 들려오던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왔다. 어느새 귓가에 A 자신의 울음소리가 한가득 했다. 내가 우는 건지, 물이 우는 건지, 그도 아니면 내가 나인지, 물이 물인지, 물속에 내가 있는 건지, 물이 내 속에 있는 건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의식이 아득히 멀어질 뿐이었다. 요동치는 물소리, 그 안에 내 울음소리, 또 메아리치는 물결의 파동, 무겁게 부서지는 물의 파열음, 마찰음, 낮게 가라앉는 묵직한 소리.


흐-억...!!


물이라도 한 바가지 토해낼 것처럼 무거운 숨을 뱉어냈다. 말라붙었던 폐가 순간 들이마신 숨에 펴지기라도 하는 듯 들숨 날숨이 날카로웠다. 매번 일어날 때마다 항상 느끼는 이 불쾌한 감각은 몸서리치게 끔찍했다. A는 죽었다 살아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경험에 뒷목이 뻐근했다. 팔다리에 오소소 솟은 감상은 A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대변했다. 욕지거리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지만 어디에 해야 하며 누굴 욕해야 하는가. 이마저 답답한 상황에 A는 더욱 기분이 더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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