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위하여(For the Story)

제1장 이번 생엔... #1 눈을 감으면 도시는 물에 잠긴다 - 3

by 단영화

꾸르륵-


의식이 들자 또 물속인 듯 먹먹했다. 멀리서부터 전신이 압박감에 잠식당하면서 몸이 무중력 속으로 부유했다. 짙은 공허 속에 홀로 남아 무한히 떠돌 것 같은 공포에 압도되자 팔다리가 무겁게 축 늘어졌다. 긴장으로 경직된 근육의 떨림이 손발 끝에서 목덜미로 번졌다. 숨이 떨어진 직후 빳빳하게 굳어가는 시체처럼 심장으로 들어오는 혈액이 차갑게 식었다.


까르르..!


귓가에 옅고 희미한 웃음소리가 스쳤다. 꽉 틀어막은 듯 텁텁하고 무거워서 작은 물결 소리에도 금방 흩어졌다. 옅은 물살이 조심스럽게 흩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어깨를 넘는 길이의 긴 머리카락이 피부를 간질였다. 두 뺨과 목덜미, 어깨뼈를 따라 흘러내리며 안심하라는 듯 부드럽게 감쌌다. A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사방이 어두컴컴하고 작은 빛 하나도 들지 않았다. 몸은 부유했지만 제 자리를 돌고 있는지 어디론가 향하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연신 눈꺼풀만 느리게 깜박이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까르르..!


다시 들리는 희미한 웃음소리였다. A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작은 방울 소리처럼 가볍고 간드러진 소리였다. 아이들 웃음소리같이 명랑하고 경쾌하지만 둔한 울림을 타고 메아리처럼 요동쳤다. 둥실 대는 파동은 가볍게 A를 스쳤다. 피부에 닿은 울림은 전신을 타고 미끄러지며 간지럽혔다.


까르르..!


순간 웃음소리가 귓가를 빠르게 스쳤다. 깜짝 놀란 A는 단말마 비명을 쳤다. 입과 코에서 물거품이 쏟아져 나왔다. 긴장으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꾸르륵.. 꾸르륵..!


공기 방울 사이로 물결을 타고 머리카락 같은 무언가가 부드럽게 손등을 스쳤다. 하늘하늘한 움직임이 피부 위를 유연하게 타고 내렸다. 두려움에 떠는 A는 낯선 감촉이 스칠 때마다 움찔거렸다. 사방이 뚫린 곳에서 어디서 올지 모르는 정체 모를 생명체의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은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했다. 그것은 점점 A와 거리를 좁혀왔다. 피부 위를 스치기만 하던 감촉은 A의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A를 툭툭 건드렸다. 머리카락 같기만 하던 그것은 길고 탄탄했고 끝부분은 말랑말랑했다. 흡사 해파리 다리 같은 감촉이었지만 그보다 젤리처럼 탄력 있고 질겼다. 손을 스치던 감촉은 어느새 하나가 아니었다. 머리카락 다발처럼 무리를 이뤄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움직이며 A를 스쳐 지났다. 기다란 말미잘 무리가 군집을 이룬 바위틈을 느리게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묘하게 불쾌한 압박감에 A는 몸서리쳤다.


얘..!


빠르게 귓가를 스치는 목소리, A의 시선이 목소리 쪽으로 돌아갔다. 장난기 가득한 가느다란 목소리가 바람결처럼 속삭였다. 작고 가냘파서 다시 바스락대는 물보라에 사그라들었다. 부서진 소리 사이로 다른 소리가 날아들었다.


너..!

야..!

이제..!


하나같이 장난스러운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했다. 깔깔대며 웃는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수선스럽게 재잘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여러 명이 두서없이 겹쳐가며 떠들어 대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대화라기보다는 여럿이 속삭이는 돌림노래였다. 뭐라는지 궁금한 A는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스..아..

..하기는..

도저..인데..

하기가..


귀를 기울이자 조금씩 각각 이야기가 들렸다. 토막토막 들리는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않았다. 정확히 이야기라기보다 단어가 두서없이 나열되는 정도였다. 목소리들은 뭐가 즐거운지 더욱 신나서 재잘거렸다. 빠르기가 일반적인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보다 훨씬 빨라서 잠시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금방 이야기를 놓쳐버렸다.


..그러니까..

여기서..

..아니야..!

놀자..!


집중할수록 그들이 하는 말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듯했다. 눈을 꼬옥 감고 온몸에 힘을 풀고 A 주변의 생명체에 신경을 끄니 이야기가 더 잘 들렸다.


..에서 움직였다니까.. 그래서..

..다시 보니까.. 서로..

마주친 거야.. 그때 거기서..


이야기에 집중할수록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A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간드러진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속삭였다. 귓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고막을 녹이고 그 안의 기관까지 녹아내려 덩어리로 뭉쳐버릴 만큼 달콤했다. A는 점점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생각을 거부하듯 이성이 마비되고 사고가 멈췄다. 홀린 듯이 낯선 생명체에 몸을 맡기니 나무에 걸린 듯 축 늘어졌다. 어둠 속에 갈피를 못 잡던 눈동자도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목소리는 점차 합쳐져 A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오랜 시간 내려온 나를 전한다

위와 아래가 섞이고 어둠과 빛이 경계를 흐리고 흩어진 별빛이 노래를 부른다

묻힌 길이 드러나면 하늘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하늘이 된다

방법은 흩어지고 수단은 깨지며 질서는 무너진다

벌거벗은 자들이 수치를 잃고 자유를 되찾는다

육신에 담긴 시간은 영원하고 깨인 자가 영혼을 지표로 삼는다

나와 너가 따로인 적 없으니 처음과 끝이 같고 계절이 반복됨이라

우주에 넘치는 사랑을 모두 알아챌 때 영겁과 찰나가 하나 된다]


이야기가 끝나자 재잘거림도 사라졌다. 컴컴한 어둠 속 스치던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아니라 손이 A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매끄럽고 시원한 온도의 손은 인간이 아니었다. 목덜미와 어깨를 감싸자 넓고 얇은 막이 A를 감쌌다. A는 인형처럼 잡아끄는 손에 끌려갔다. 따스한 느낌이 퍽 다정했다. 천천히 소중하게 잡아끌지만 강하게 끌어안는 힘에는 진한 애정이 묻어 나왔다. 어둡고 낯선 공간이 애틋하고 살갑게 변했다. 주변의 온도가 2도씩 오르는 듯 좀 더 포근했다.


쪽-


마지막으로 꼭 껴안았던 품에서 A 뺨에 입술이 살포시 닿았다. 아쉬움을 가득 담은 마지막 손길이 떨어지니 어둠 속 정체들이 존재를 감췄다.


스으-


어둠에 익숙한 눈에 옅은 빛이 흘러들었다. 허공을 응시하던 A의 눈은 초점을 찾아 빛 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중심은 노란빛으로 부드럽게 빛났고 희미한 테두리는 푸릇한 연둣빛이었다. A를 스친 존재들의 흔적인 듯 점차 푸릇한 노란빛으로 둘러싸였다. 입술이 스친 A의 뺨까지 밝게 빛나더니 빛은 점차 단단한 외형을 갖춰 작고 동그란 구슬이 되었다. 몸에 붙은 구슬은 서로 들러붙어 얼음처럼 단단히 뭉쳐 형태를 이뤘다. 주먹만 하던 크기가 점차 불어나 A보다 거대해졌다. 안쪽에서 환하게 새어 나오는 빛은 푸릇한 노란빛에서 샛 노란빛으로, 다시 희뿌연 빛으로 변했다. 몽롱한 하얀빛이 감도니 거대한 구슬 덩어리는 한데 뭉쳐져 꿈틀거렸다. 느릿한 움직임은 조금씩 속도를 더했다. 리드미컬하게 형태를 잡아가니 얼굴과 몸통, 팔이 달린 인간의 모습이었다. 하체는 다리보다 길게 하나의 형태로 늘어졌다. 거대한 덩어리는 구체적인 모습을 세밀하게 다듬었다. 눈과 코, 입, 귀가 형태를 드러냈고 덩어리 하나에서 손가락이 하나씩 떨어졌다. 다리가 생겨야 할 자리에 하나의 덩어리 밑으로 긴 지느러미가 생겼다. 점차 사람의 모습이 되었고 허리 밑으로 대형 어류만큼 거대한 지느러미가 붙었다. 지느러미 표면은 반투명하지만 푸릇한 노란빛 비늘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하반신 전체를 빼곡하게 채워 피부를 갑옷처럼 감쌌다. 인간 모양의 상체는 희뿌연 빛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투명하고 창백한 피부 안쪽으로 체액의 움직임이 보일 만큼 얇고 여린 막은 겹겹이 여러 장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점막을 둘러 피부를 보호했다. 태양 빛 아래 잠시라도 머물렀다가 그대로 내장까지 화상을 입을지도 모를 만큼 가냘픈 자태였다. 손가락 사이, 팔과 다리 관절 사이, 겨드랑이마다 더욱더 섬세한 점막이 얇은 실크 천을 두른 듯 몸을 감쌌다. 귀 뒤쪽에서 목덜미, 턱으로 내려오는 목덜미까지 수십 개의 깊숙하게 패인 상처 같은 아가미가 쭉 벌어졌다. 머리카락은 탄력 있는 점막에 들은 듯 A의 머리카락과 달리 움직임이 더 크고 역동적이었다. 그것은 인어였다. 형태를 전부 갖추니 시간이 멈춘 듯 움직임이 멈췄다. 목각인형처럼 전혀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헉...!


멈춘 시간이 움직이듯 숨을 마시니 아가미로 한꺼번에 물거품이 쏟아졌다. 고통에 몸부림치듯 눈을 크게 뜨고 목을 부여잡은 채 몇 차례 컥컥 댔다. 가슴이 크게 요동치고 점막이 물결에 흔들리기를 반복하다가 인어는 진정됐는지 편안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입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니 목덜미의 아가미도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파르르 흔들렸다. 이번엔 물거품이 쏟아지지 않았고 작은 물살만 흘러나왔다. 인어는 A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눈이 마주쳤다. 희뿌연 빛으로 빛나는 피부 위에 보석 알이 박힌 듯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바닷속처럼 짙고 푸르른 사파이어색이었다. 차분한 눈이 호기심과 애정으로 가득했다. 가볍게 꼬리를 흔드니 인어의 몸이 A 쪽으로 스르륵 밀려왔다. 인어가 밀려오니 주변으로 가볍게 물결이 요동을 쳤다. 머리카락이 흔들려 두 뺨을 스쳤다. A는 손으로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시선이 돌아간 사이 인어의 손이 뺨을 스치는 A의 손 위로 살포시 포개졌다. 여전히 시선이 마주친 채였지만 거리는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인어는 망설임 없이 다가와 두 손으로 A의 뺨을 소중하게 감쌌다. 모든 점막이 인어와 A를 둘러싸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었다. 인어는 눈을 감고 A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자연스럽게 A도 눈을 감았다. 시원한 기운이 입술에 전해졌다. 인어의 배에서 희뿌연 빛이 눈이 멀 것처럼 하얗게 빛나더니 내장을 통해 입으로 올라왔다. 맞닿은 입술 안으로 매끄럽고 동그란 구슬이 하나 흘러들어왔다. 구슬은 인어보다 따뜻했다. 오히려 뜨거울 정도였다. 입으로 들어온 구슬은 금방 A의 목구멍을 타고 굴러 들어갔다. 구슬의 움직임을 따라 뜨끈한 기운이 내장을 타고 전해졌다. 뱃속 깊은 곳까지 내려간 구슬은 환하게 빛나더니 어느새 열기만 남긴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 배꼽 근처에서 그 아래까지 작은 불씨가 작열하는 듯한 열감이 지속됐다. 뜨겁고 강렬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구슬이 사라지자 환한 빛도 사라졌다. 흰빛이 흐려지니 인어는 입술을 떼고 A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A는 눈을 떠 인어를 마주 보았다. 그는 그저 A를 지그시 응시할 뿐이었으나 시선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마주한 인어의 정수리부터 턱 끝으로 쩍 하고 금이 갔다. 한없이 부드러운 점막이 대리석처럼 단단해지기라도 한 듯 그는 A에게 시선을 곧게 두었을 뿐 미동도 없었다. 조금씩 인어의 형태가 허물어졌다. 제 쓰임을 다한 뒤 어떤 미련도 없다는 듯 인어는 형태를 잃어갔다. A는 마주한 인어의 얼굴이 부스러짐이 안타까워 손으로 그의 얼굴에서 떨어진 잔해를 쓸어 올렸다. 제 자리로 끌어모아도 인어는 계속 부스러져 형태를 잃어가기만 가속했다. 안타까움에 인어의 잔해를 끌어안자 그제야 A는 자신도 허물어져 가고 있음을 알아챘다. 아주 작은 알알이 흩어져 잔잔한 물결에도 형태를 잃고 흩어졌다. A는 덜컥 겁이 났다. 떨어져 나간 곳에서 뜨겁게 타올랐다. 스파크처럼 작은 불꽃은 떨어진 자리에서 불덩어리로 일어났다. 뜨겁고 쓰라린 감각이 끝에서부터 중추를 타고 올라왔다. 곧 온몸이 고통으로 물들었고 이대로 숨이 멎을 듯했다. 영혼까지 소멸해 버릴 듯한 죽음의 고통이었다. 부드럽게 감싸는 물속에서 두 사람은 강렬하게 타올랐다. 마지막까지 시선을 마주한 채 한 줌의 재가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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