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이번 생엔... #1 눈을 감으면 도시는 물에 잠긴다 -14
“영화 콘셉트 투어라고, 집으로 초대하길래 뭔가 했는데.. 이 정도면 너무 진심 아니야?”
친구는 튜브에 담근 발을 흔들었다. 물이 찰방찰방 흔들리며 튜브에 담긴 물도 흔들렸다. 얇게 깐 하얀 모래 위로 물방울이 흩뿌려 얼룩이 생겼다. 촉촉한 조개껍데기가 조명을 받아 반질반질 빛났다. 큰 거실 창으로 살살 불어오는 실바람이 종종 눅눅한 공기를 휘저어 쓸어갔다. 짭짜름한 바닷가 냄새가 아쉬웠다.
“이 정도는 약과지. 다음 투어는 아예 가구까지 싹 다 치우고 제대로 꾸며봐야겠어. 하다 보니 재밌네~”
A는 한입 남은 샌드위치를 털어 넣으며 눈을 반짝였다. 의욕이 충만해 분명 이번 휴가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휴가 계획을 세우는 중일 터였다. 친구는 활활 불타는 A를 보며 실소했다.
“아예 본업으로 삼아보지 그래. 혼자 노는 걸로 만족하지 말고.”
“음... 그럴까?”
“혹시 진짜 하고 싶은 생각 있으면 말해. 내가 도울게.”
“음... 봐서.”
친구도 남은 샌드위치를 마저 먹었다. A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씩 웃고 말았다.
“야야, 봐봐. 영화는 세 편을 준비했어. 뭐 볼래?”
개의치 않는 A는 친구에게 미리 준비한 영화 목록을 보여주었다.
“... 취향 하고는. 호러, 스릴러, 고어 아니면 안 보는 거야?”
“아니. 원래 무서울 때 호러, 섬뜩할 때 스릴러, 고기 먹을 때 고어 보는 거야. 지금은 무인도 콘셉트이지. 그러니까 셋 중에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잖아? 빨리 골라.”
제법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A는 청개구리 기질이 다분했다. 어릴 때부터 반항심이 다분한 어린이였지만 잘도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속으로 흡수하는 방법을 일찍 찾았다.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이해하는 사람과 이해 못 하는 사람으로 갈릴뿐이었다. 친구는 잠시 골똘히 생각했다.
“그럼... 고기 먹을 거니까 고어.”
“좋아. 이 친구 참 마음에 드네~”
주방엔 무인도 콘셉트에 맞춰 구워 먹을 바비큐 꼬치가 한 상 차려 대기 중이었다. 튜브에서 떨어진 자리에 모래를 두툼하게 깔고 벽돌을 3장 둘렀다. 벽돌 위에 얇고 넓은 스테인리스 쟁반을 올렸다. 쟁반 위에 소형 화로용 연료를 놓고 작은 화로를 두었다. 채소와 과일을 구울 수 있도록 화로 위에 석쇠를 올렸고, 주위로 구운 꼬치를 끼워 놓을 받침대와 구울 꼬치를 얹을 받침대 두 가지를 구분해 놓았다. 고기를 구울 때 날 연기를 처리할 시스템까지 치밀하게 준비했다. 이쯤이면 콘셉트에 진심이다 못해 변태스러웠다. 친구는 준비한 파티 현장을 쭉 둘러보고 말없이 A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뭐, 왜?”
“... 아니야.”
A는 후다닥 주방에서 바비큐 재료를 가져왔다. 구울 준비를 마치고 하얀 거실 벽면에 영화를 상영했다. 본격적으로 영화 시작 전 인트로 영상이 나왔다. 곧 친구와 A는 영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몰아가며 고조될수록 바비큐 익는 냄새와 영화의 음향이 조화로웠다.
으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피와 살이 튀는 살벌한 현장이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살해 위협을 받았고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 쳤다. 끈질기게 따라붙은 추격자는 주인공의 신변에 위해를 가했다. 주변을 맴도는 불온한 기운은 결국 주인공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정체를 밝히지 않은 범인은 어둠 속에서 몰래 다가갔다. 손엔 얇고 날카로운 와이어가 날카롭게 빛났다. 숨죽여 다가가 민첩하게 주인공의 목에 와이어를 둘러 감았다. 주인공은 숨이 막히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보랏빛으로 푸릇하게 질린 얼굴이 죽음의 공포로 물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살인자의 얼굴이 막 드러났다.
“뭐 해?”
“아아-악-!!!!!!!!!!”
영화 장면 속 살인자의 얼굴에서 튀어나온 건 C의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이었다. A가 비명을 지르니 친구는 덩달아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의 상태를 관망하던 C는 벽면을 뚫고 나왔다.
“아, 아니! 왜 거기서 나와요?!”
당황한 A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버럭 질렀다. C는 대수롭지 않은 듯 재킷을 툭툭 털어 주름을 정리했다.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바비큐 냄새를 맡고 오래된 친구라도 발견한 듯 기뻐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친구는 혼자 버럭 소리를 지르는 A를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넌 괜찮아? 와, 너무 놀라서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어! 와!”
“놀라긴 했는데... 이 장면이 그렇게 놀랄 정도야?”
A가 세상 떠나갈 듯 호들갑 떨자 친구는 의아한 눈빛으로 반문했다. 평소 A가 보는 영화 목록을 봤을 때 결코 이 정도 수준으로 놀라서 소리 지를 리가 없었다. 친구는 혼자 돌아가는 영화와 A를 번갈아 보았다. C는 그 와중에 바비큐용 작은 화로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고기 익는 냄새에 감탄했다.
“아니, 영화 말고 이..!”
갑자기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A는 입을 다물고 C를 쳐다보았다. A가 시선을 돌리니 친구도 A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 안 보여?”
“... 뭐가?”
A와 친구는 서로 다른 생각으로 충격을 받았다. 충격받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며 각자 다른 이유로 경악했다.
“이거 먹어도 돼?”
C는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꼬치를 들었다 놨다 하며 고기가 익은 정도를 확인했다.
“... 아니야.”
“잠깐만, 야. 뭐가 아니야? 너 괜찮아?”
친구는 심각한 표정으로 A의 어깨를 잡고 안색을 살폈다. A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일단 성급히 시선을 피했다. A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가까이 다가오는 친구를 밀쳐냈다.
“무슨 일이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동공은 까맣게 확장했고 안색은 파리한 주제에 괜찮다고 하니 친구는 A가 더 수상했다.
“아니야, 너 안 괜찮아 보여. 뭐야? 빨리 말해.”
“정말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친구는 안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다고 하는 A가 정말 더욱더 수상했다. 자꾸 추궁하며 집착하듯 캐묻자, A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다가오는 친구를 밀쳐내며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 얼굴을 가렸다.
“야, 무슨 일이냐고.”
A가 뒤로 물러나며 자리를 피하니 친구는 얼굴을 가린 A의 손목을 꽉 쥐었다.
“지랄들을 하네. 신파 찍냐?”
C는 거의 다 익어서 타기 일보 직전인 꼬치를 들고 다른 손에 나머지 꼬치를 들어 A와 친구에게 삿대질했다. 꼬치의 고기가 사방으로 흔들릴 때마다 하얀 모래 위에 고기 기름이 튀었다.
“조용해!”
“... 뭐?”
순간 거실 분위기가 싸늘했다.
“아니, 너 말고...”
“걔는 나 못 보나 봐?”
귓가에 C가 낄낄대는 소리가 들렸다.
“제발 조용히 하고, 나중에 이야기해요.”
A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차분히 또박또박 말했다. 이번엔 친구가 크게 당황하며 손이 덜덜 떨렸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자자, 진정해.”
차갑게 식어가는 친구의 두 손을 꼭 잡고 일단 자리에 앉았다.
“요즘 내가 몸이 허해서 헛것이 보여~ 아하하! 영화가 엄청 무섭네!”
A는 애써 되지도 않는 변명을 이어갔다. C가 모아 놓은 꼬치를 뺏어 접시에 올렸다. 최대한 빠르게 다 익은 바비큐 꼬치를 나눠 담고 친구에게 하나 건네주었다.
“자자, 먹어, 먹어! 이 영화는 너무 무서워서 더 못 보겠다! 그만 보고 고기나 먹자!”
보던 영화도 후다닥 끄고 구석으로 전부 치워버렸다.
“야, 내 바비큐는 없어? 나도 입이야.”
잠깐을 못 참고 C는 징징대기 시작했다. A는 먼저 소분한 바비큐 접시를 냉큼 아무 말하지 않고 C 앞으로 내밀었다. C는 기뻐서 펄쩍 뛰고 바비큐 꼬치를 마구 흡입했다.
“친구야, 저기 봐봐.”
A는 C를 가리켰다. 친구는 시선을 돌려 허공을 보다가 의아한 눈으로 다시 A를 쳐다보았다.
“진짜 괜찮은 거 맞지...?”
“그럼, 그럼! 요즘 일이 많았어! 바쁘고 힘들어서 그래! 자! 고기 먹고 힘내서 나머지 휴가도 잘 보내야지!”
A는 힘차게 꼬치에 꽂힌 고기를 빼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고기를 씹는지 돌을 씹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괜찮은 척이 통했는지 A를 걱정스럽게 보던 친구도 천천히 고기 꼬치를 먹었다.
“... 일이 힘들면 좀 쉬어. 나한테도 말하고. 나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어.”
“어유~ 말이라도 고맙다. 나 진짜 괜찮아. 오늘 재밌게 놀고 가. 그게 더 좋아.”
A는 최대한 활기차게 방긋 웃었다.
“아유~ 쿨럭, 쿨럭!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가! 가여우면 영양제나 한 통 사주고 가! 알겠지?”
너스레를 떨자 여전히 걱정하는 친구였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어떻게든 넘어간 듯했다. A는 속으로 안도했다.
“피곤하네~ 보이면 좋을 텐데.”
어느새 먹을 만큼 먹었는지 C가 친구의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관찰하는 듯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을 통통 튕기며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친구를 살폈다.
“... 재밌네- 소꿉친구야?”
A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같이 지낸 시간이 그렇게 긴데, 나를 못 봐? 호오-”
흥미로운지 허공을 친구의 얼굴에 바싹 들이댔다. 천장에 닿을 듯 커다란 키 덕분에 몸은 움직이지 않고 허공만 친구의 얼굴을 360도 돌아보는 광경은 어느 영화보다 기괴했다. 한 바퀴 돌고 나서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이 더욱 빠르게 맥동했다.
“참 기묘한 인연일세-”
대답이 곤란한 A는 빠르게 손사래 쳤다. C는 못마땅한 듯 A를 한 번 쳐다보고는 모자를 긁적였다.
“맨날 너 혼자 지내니까 그러는 거야. 나 말고 사람도 만나도 그래. 사회생활 하잖아, 너?”
뜬금없는 친구의 타박 공격이었다. 맨날 하는 잔소리지만 오늘만큼은 성심성의껏 듣는 게 좋아 보였다.
“아냐~ 나도 가끔은 사람도 보고 살아. 왜 그래? 왜 갑자기 사람을 사회 부적응자로 만들어?”
금방 한 A의 다짐이 오래지 못한 건 불가항력이었다. 친구는 A를 너무 잘 알았다.
“지난번에 소개팅 한 건 어떻게 됐어?”
“통화했잖아. 재밌었어.”
“아니, 연락 말이야.”
“아... 그 뒤에 연락하긴 했지.”
“... 관심은 있어?”
“응. 괜찮은 사람이지.”
“또 대충 얼버무린다. 그 소개팅 자리 만드느라 얼마나 공들였는지 알아?”
“무슨 소리야?”
“... 너만 모르는 너의 애정사란다.”
“뭐?”
“걔가 널 안건 꽤 오래전이야.”
“그건 나도 알아. 소개팅에서 이야기했어. 너랑 같은 동아리였다며. 거기서 네가 내 이야기했다던데.”
“... 음흉한 놈. 그 소개팅하려고 몇 년을 기다렸어.”
“몇 년씩이나 기다릴 일이야?”
“다 네가 쓸모없이 바쁘니까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봐봐. 맨날 혼자 이러고 노니까 시간이 안 맞잖아. 언제 약속 잡자고 하면 물어볼 때마다 시간이 없대. 넌 영화 투어 준비하느라 감전을 감내하고 전등갓을 갈 시간은 있어도 예쁘게 입고 집 밖에 나올 시간은 없지! 이번 소개팅 날도 너 상태 봐가며 타이밍 맞춰서 휴가 내고 스케줄 비워서 간신히 만든 자리인 거 알아?”
“... 내가?”
“이거 봐. 지가 그런 줄도 몰라. 네가 바로 천하의 유죄인간이다, 이 것아!”
“어... 미안.”
“됐고. 자세한 이야긴 내가 할 말이 아니니까 직접 들어. 그러니까 연락을 좀 해주라고, 이 진상아. 하루가 멀다고 징징대서 짜증 나. 내 남자도 아닌데 그놈 투정까지 들어줘야겠냐고!”
“어... 그래. 미안하다.”
“핸드폰!”
“어...?”
“내놔, 이것아.”
친구는 마치 제 것인 양 A의 핸드폰을 갈취했다. 자연스럽게 핸드폰 잠금을 열고 메신저를 열었다. 연달아 폭격을 맞은 A는 맹하게 친구의 만행을 목격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신이 돌아온 건 친구 뒤에서 메신저 내용을 읽던 C가 특유의 그로울링 섞인 웃음을 지으며 켈켈 거릴 즈음이었다.
“어...?”
“자.”
메신저 내용을 작성 후에 핸드폰을 들어 A에게 보여주었다.
[우리 만나요. 토요일 점심 어때요? 제가 살게요.]
“어...?!”
당황한 A는 핸드폰을 뺏으려 손을 뻗었다. 예상한 듯 친구는 A가 보는 앞에서 작성한 메시지의 전송 버튼을 눌렀다. 친구의 사악한 미소가 아주 느린 장면으로 흘렀다.
“안돼-!!!!!!!!”
절규하는 A 앞에 친구는 핸드폰 화면을 전리품처럼 전시하고 지옥에서 막 탈출한 악마처럼 웃었다. 친구 등 뒤로 C도 A와 같이 긴 팔을 포개 팔짱을 끼고 사악하게 웃었다. 이쯤이면 서로 못 볼 뿐이지 한통속임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