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이번 생엔... #1 눈을 감으면 도시는 물에 잠긴다 -18
“밥 먹었어요?”
짜증스러운 매미 소리와 끝을 모르는 어색한 공기를 먼저 깬 건 A였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을 건넸다.
“... 예?”
00은 여전히 새빨갛게 익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A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는 A 눈동자가 무척 맑았다.
“저 늦은 점심 기대하고 나와서 여태 공복이거든요. 대책은 배 좀 채우면서 세워도 될까요?”
A는 눈알을 도르륵 굴리며 00을 간절히 쳐다보았다.
“아, 네! 오늘 날씨가 정말 더웠죠!”
당황한 00은 열기가 훅 올라와 귀 끝까지 새빨갰다.
“자요.”
먼저 벤치에서 일어난 A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일단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가요.”
새빨간 얼굴로 A를 올려다보던 00은 홀린 듯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A는 생글 웃고는 덥석 00의 손을 잡았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00을 일으켜 질질 끌고 차가 다닐만한 도로로 움직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피고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았다. 주말 저녁 시간대 번화가라 몇 대가 두 사람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근처에 두 사람 말고 택시를 타려는 사람이 몇몇 모여 무리를 이뤘다. 택시는 두 사람을 지나쳐 다른 사람들 앞에 섰다. 택시를 타려는 사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후우- 후우-
00은 숨이 가빠왔다. 팔다리가 저리고 혈관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시야가 일렁이고 체온이 떨어져 식은땀이 났다.
“괜찮아요?”
택시를 잡던 A는 손에 떨림을 느꼈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해 얼른 시선을 돌려 00의 안색을 살폈다.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이 곧 쓰러질 듯 핼쑥했다.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숨이 불편한지 어깨가 불규칙하게 들썩였다.
“몸이 많이 안 좋아요? 병원으로 갈까요?”
A는 열이 있는지 손으로 이마 온도를 확인했다. 체온이 떨어진 듯 이마가 무척 차가웠다.
“아니요! 괜찮아요! 태, 택시!”
그때 두 사람 앞에 빈 택시가 섰다. 00은 택시 뒷문을 열고 걱정하는 A를 먼저 안으로 보냈다.
“00으로 가주세요!”
무슨 말을 꺼낼 틈도 없이 00은 먼저 선수 쳤다. 택시가 출발하고 흘긋 눈치를 살피자 곱지 않은 A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 그랬어요. 오늘 너무 놀라서...”
데이트하기도 전에 집으로 귀환될지도 몰라 00은 최대한 가여운 눈빛을 보냈다. 사납던 A의 눈빛에 부드러운 기운이 돌았다.
“손... 조금만 더 잡아주시면 진정될 거 같아요.”
00은 기왕 하는 김에 조심스럽게 손도 내밀었다. A는 가만히 00이 내민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택시 타기 전처럼 떨림은 없었다. 몇 번 눈을 끔뻑대던 A는 조심스럽게 00의 손을 잡았다. 00은 조금씩 안색이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다른 동네에 내렸다. 익숙한 동네인 듯 00은 A를 데리고 근처 가게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분위기에 외국 분위기 물씬 나는 5평짜리 작은 펍(Pub)이었다. 아직 5시가 안 된 여름 오후 시간이라 그런지 이제 막 문을 열어 가게 주인이 분주하게 테이블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00은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를 했다. 가게 주인도 이미 얼굴을 아는 사이인 듯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직 손님이 한 팀도 없어 한산했다. 어차피 자리도 테이블도 네 개뿐이었다. 적당히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긴 사람 많이 안 와요.”
00은 어수선한 내부 인테리어를 살펴보던 A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대답했다. 뭔가 말을 꺼내려던 A는 도로 입을 닫았다.
“저희 동네에 제가 자주 오는 집이에요. 술집이긴 한데 안주 맛집이에요. 밥만 먹으러 자주 옵니다.”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하자 더 의심스러웠다. A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00을 한 번 보고는 메뉴로 시선을 돌렸다.
“너무 놀랐을 땐 술이 도움 되죠.”
“하하하... 여기 타코 맛있어요. 감자튀김에 토핑 전부 추가해서 드세요. 치즈 좋아하시면 칼조네(calzone)도 드세요.”
“그럼 저는 이거랑 이거, 이거, 이거 이거랑 이거요.”
“네, 사장님-!!!”
00은 잽싸게 주문했다. 가게 카운터 한쪽 작은 주방은 따로 투명한 칸막이를 둘렀다. 작은 가게는 사장 혼자 운영했다. 사장은 주문을 접수하고 카운터 포스 기계에 입력한 뒤 조리 공간으로 들어갔다. 조리하는 소리가 크지 않아 A와 00,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감돌았다.
“... 우리 고작 두 번째 데이트인데 참 다사다난하네요.”
“... 그러게요. 혹시 길에서 누가 배고프다며 도와달라고 해도 함부로 도와주지 마세요.”
“... 푸훗...”
“... 웃지 마요. 부끄러워서 죽겠으니까...”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래요. 와~ 도?!”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 도 같은 건 가짜 뉴스인 줄 알았어요. 저런 걸 누가 당하나 싶었는데 제가 바로 그 누더라고요.”
“진짜 길 가다가 갑자기 물어봐요?”
“네. 진짜 기운이 맑다, 눈빛이 맑다, 이런 이야기해요. 조상님께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돈 달라고도 해요. 알아서 한다니까 우리 집 조상님이 자손들을 망하게 할 거라고 했어요.”
“... 네?”
“싫다니까 절 쫓아왔어요. 대낮에 대한민국에서 말이 됩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 삼만 원에 정성만 드리면 놔준다길래 알겠다고 했어요.”
“... 네?!”
“도저히 놔줄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그럼 따라갔다고요?”
“... 네. 갔더니 한복 같은 걸 주고 입으라고 하더라고요. 입고 절 몇 번 하고 수돗물 먹으라고 주는데 안 먹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다 끝나고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거 같길래 도망쳤어요.”
“... 와...”
이야기를 듣던 A는 기가 막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때마침 음식 준비를 끝낸 가게 주인이 넓은 쟁반에 타코 세 종류와 감자튀김, 칼조네, 두툼한 맥주 전용 유리잔에 담긴 풍성한 노란빛의 맥주 두 잔을 내왔다. 테이블이 빡빡하도록 가득 채워 놓자 절로 푸근했다.
“자요. 맥주로 소독해요. 이따 센 술도 한 잔 마셔요.”
00은 고개를 연신 위아래로 끄덕이고 맥주잔을 들어 시원하게 들이켰다. 목울대가 출렁이며 꿀꺽꿀꺽 소리를 내자 맥주잔 반절이 금세 비었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A는 포크를 들어 감자튀김에 손을 댔다. 갓 튀긴 감자 위에 양파와 파프리카로 맛을 낸 칠리소스를 얹고 세 가지 종류의 치즈와 할라피뇨로 마무리한 감자튀김은 따끈따끈하고 바삭하고 고소해서 소스와 궁합이 훌륭했다.
“맛있죠?”
대꾸 없이 감자튀김을 향한 포크질이 격해졌다. 00은 A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제가 이 집 단골이라고 했잖아요. 많이 먹어요.”
00은 남은 맥주를 깨끗이 비우고 한 잔 더 주문했다. 그 후에야 포크를 들고 감자튀김을 몇 개 입에 넣었다. 음식이 나오고 두 사람은 배가 찰 때까지 말이 없었다. 사실 A가 음식에 집중한 나머지 00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여름 더위와 반나절 이상의 공복 상태는 충분히 이성을 상실할 만했다.
“와- 배부르다- 이 집 맥주도 참 맛있네요.”
대부분 안주를 해치운 뒤에야 A는 정신이 들었다. 배가 불러 기분이 좋았지만 00이 계속 보고 있단 걸 눈치챈 A는 살짝 부끄러웠다.
“... 흠흠! 뭐 더 드실래요?”
“아니에요. 저도 충분히 먹었어요. 술은 더 안 드세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그럼 전 독주로 한 잔만 더 할게요.”
A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가게엔 손님이 들어와 테이블 두 개를 채웠다. 가게가 작아 복작복작했지만 어수선하지는 않았다.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서로 라디오의 백색소음처럼 포근했다. 00은 낮의 사건이 어느 정도 잊힌 듯했다. 술기운 덕분인지 창백했던 얼굴은 발그레 혈색이 돌았다.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이번 휴가 때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우리 소개팅 성사하기 정말 어려웠다고.”
“쿨-럭!”
독주에 막 입을 댄 00은 잘못 삼켰는지 기침을 크게 했다.
“아... 네. 그랬죠.”
“자세한 이야기는 데이트하면서 들으라던데, 맞아요?”
“하하하... 단도직입적이시네요.”
“돌려 말할까요?”
“아니요, 아니요. 좋아요. 아주 좋아요.”
“두 사람은 이미 끝낸 이야기인데 저는 모르는 거 같아요. 안 할 거면 아예 하지 마시고 할 거면 시원하게 털어놔요. 답답하게 그러지 말고.”
“... 제가 용기가 부족해서 그래요.”
“용기요?”
“아마 A씨만 모르는 이야기일걸요.”
“뭘요?”
“지금 이 문제를요.”
“그러니까 무슨 문제를요?”
“아...”
당황한 듯 00은 안색이 변했다. 생각이 많아 보였다. 00은 거듭 망설였지만, A는 그가 먼저 입을 열길 기다렸다. 00은 얼굴이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만큼 새빨갰다. 곧 폭발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달아올랐다. 긴장한 듯 마른 입술을 연신 혀로 핥았다. 고민하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00은 이내 결심한 듯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 A씨가 제 첫사랑이자, 짝사랑이거든요.”
“... 아... 그 중요한 사실을 저는 왜 몰랐을까요...?”
“제가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어요.”
“... 그럼 언제...부터...?”
“기억 못 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 처음 본 건 꽤 오래전이에요.”
A는 오래된 기억회로를 돌려보았지만 00에 대한 기억은 전무였다.
“... 당연히 모르죠. 저만 봤거든요.”
“어디서...?”
“정말, 우연히, 길거리에서, 갑자기 그렇게 보게 될 줄 몰랐어요. 동아리 때는 이야기만 들었거든요. 물론 000이랑 같이 찍은 사진을 보기도 했죠. 실제 본 건 그날 딱 하루뿐이었어요.”
“그러니까 언제...?”
“2학년 봄에 꽃놀이 간 적 있죠? 그때 원래 다 같이 모일 예정이었어요. 다들 사정이 생겨서 날짜가 바뀌는 바람에 못 모였는데 저만 그날로 알고 있었어요. 혼자 기다리고 있었는데 000이 보이더라고요. 000만 온 줄 알고 인사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마주쳤어요. 거리가 멀어서 저를 못 봤겠지만. 그날 제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A는 흐릿한 기억 속에서 간신히 처음 친구들하고 간 꽃놀이를 떠올렸다. 새파란 하늘에 연분홍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선 여린 바람에도 덧없이 흩어지는 햇살 냄새 가득한 봄이었다. 철없이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며 사방팔방 뛰어다녔던 날이었다. A는 부끄러움 반 수치심 반으로 얼굴이 새빨갰다.
“그날 하루 종일 따라다녔어요. 중간에 000한테 걸려서 인사도 했어요. 인사시켜 준다는데 절대 안 된다고 조용히 하라고 했었죠. 진짜 오래된 이야기네요. 꽃놀이 끝나고 기숙사 들어간 다음에 000이 따로 불러서 묻더라고요. 관심 있냐고. 그래서 좋아한다고 그랬어요. 만나게 도와준다는데 그땐 안 되겠더라고요. 고백은 알아서 할 테니까 비밀로 해달라고 했는데... 한두 명씩 걸리다 보니까 나중엔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딱 한 사람 빼고 거의 다 걸린 셈이죠.”
00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A와 눈이 마주쳤다. A는 심하게 당황한 듯 얼굴이 새빨갰다. A의 안색을 살피던 00은 살포시 눈을 살짝 깔았다. 두근거리는 심장박동 소리가 고막을 뚫고 나올 기세였다. 긴장으로 눈꺼풀이 가늘게 파르르 떨렸다. 깊게 드리운 속눈썹 그림자가 00의 흥분을 어둠 속에 숨겼다. 00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