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이번 생엔... #1 눈을 감으면 도시는 물에 잠긴다 -19
“아...”
할 말을 잃은 A는 말간 00의 눈을 응시했다. 00 인생에 중요한 이야기겠지만 두 사람 모두 하루가 무척 길었다. 지치고 피곤한 상황에 달가운 주제는 아니었다. A 입장에서 자주 듣는 말도 아닐뿐더러 00에게 호감이 있다지만 당장에 다소 무거웠다. 누군가의 인생에 정말 중요한 일일 수 있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에는 굉장히 뜬금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A는 고장 난 기계처럼 버벅거렸다. 마주한 00이 예쁘게 생긋 웃었으나 A는 정신이 아득히 멀어져 갔다.
“자, 드세요!”
A를 살피던 00은 맥주잔을 들었다. A는 어안이 벙벙해 덩달아 엉거주춤 맥주잔을 들었다.
“오늘 하루가 길었어요. 시원하게 한 잔 해요.”
00은 말간 표정으로 생글 웃어 보였다.
“부담 주려던 게 아니에요. 이젠 마무리 짓고 싶었어요. 짝사랑이 길어서 끝내지 않으면 평생 연애 못 할 것 같아서요.”
“... 그냥 다른 사람 만나면 안 돼요? 누가 안다고 고백하고 마무리 짓고 절차를 밟아요?”
“저는 알죠. 이도 저도 아닌 마음 끝까지 끌어안고 살다가 후회로 남느니 원하는 대로 시원하게 질러보려고요. 결혼했는데 잊지 못한 첫사랑 생각에 밤마다 눈물로 지새우면 저도 힘들고 아내도 힘들고 못 할 짓 아니에요?”
“... 음, 그건 참 마음에 드네요.”
A는 씨익 웃으며 맥주잔을 들었다. 00은 장단에 맞춰 맥주잔을 들어주었다.
“그럼, 오늘로 거의 10년에 가까운 짝사랑도 끝이네요.”
“에이- 왜 마음대로 끝내고 그래요? 이제 처음 말 꺼냈는데.”
“아... 끝내려고 고백한 거라면서요?”
“짝사랑을 끝낸다고 했지, 첫사랑을 끝낸다고는 안 했어요. 말했잖아요. 첫사랑이자 짝사랑이라고. 짝사랑은 끝났고 이제 첫사랑을 시작하려고요.”
00은 생글생글 눈웃음을 쳤다. 물꼬를 트니 말이 술술 나오는 게 청산유수였다.
“... 내가 이 소개팅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어요.”
“괜찮아요. 당연히 마음 크기가 같지는 않겠죠. 당장 저를 좋아해 달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시작점이 다른데 현 위치가 같을 리 가요.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는 거예요. 저는 앞으로 A씨랑 만나고 어요.”
“... 힘내요. 저도 노력은 해볼게요.”
“노력하지 마요. 그냥 A씨로 있어요. 내가 마음에 들면, 만나고 싶으면, 그때 말해줘요.”
“... 그냥 다른 사람을 만나는..”
“악-!!”
A가 말을 잇기도 전에 00은 갑작스럽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깜짝 놀란 A는 토끼처럼 눈이 휘둥그레졌다.
“... 네...?”
“듣기 싫은 소린 그만해요.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아요. 그냥 주변 공기에 내가 녹아들 시간만 줘요. 들숨 날숨같이 아~주 자연스럽게 A씨 일상이 돼 볼게요.”
난감한 A는 계속 생글생글 웃는 00을 뚫어져라 보면서 맥주잔을 비웠다. 상당히 부담스러운 이야기에 불편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물러날 기색이 보이지 않는 00은 쉽지 않았다.
“... 그래요. 잘 지내다 보면 생각이 바뀔 수 있고 그런 거죠.”
“서로요?”
“... 네?”
“10년 가까운 짝사랑 경력을 물로 보시나 봐요. 그 긴 시간 동안 마음 앓이만 했겠어요? 저는요. 짝사랑은 끝내도 절대 첫사랑을 끝낼 마음이 없어요. 생각은 A씨가 바꾸게 될 거예요.”
00은 여전히 부드럽고 다정한 미소 띠어 보였다. 단호하고 확고한 태도에 A는 점점 머리가 복잡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다. 전쟁통에도 사랑은 피어나고 병마 앞에서도 희망은 자라난다. 문명의 혜택 외의 인간은 가냘프고 연약한 육신만으로도 혹독한 자연환경에 적응했고 끝없는 번식으로 자자손손 대를 이어 DNA를 남겼다. 100년 전만 해도 손바닥만 한 기계로 지구 반대편에 사는 인간의 얼굴을 보면서 통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농경 사회를 거쳐 산업 혁명, 인터넷 혁명과 오늘날의 AI까지 눈부신 기술의 발전을 떠올리면 인간이 언제 돌로 만든 창을 던져 작은 동물이나 잡아먹으며 연명하던 시절이 있었을까 싶다. 놀랍게도 인간은 어느 환경이나 사회든 빠르게 적응했고 문명을 활용해 삶을 영유했다. 그 바탕엔 인간의 적응력이 밑바탕이었으리라고 현대인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A는 이 순간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종의 자손인지 새삼 통감했다. 밤의 세계와 균열을 안 지 얼마나 됐다고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게 흡사 반려동물이나 동반자라도 되는냥 천연덕스럽게 구경하기에 이르렀다.
“와- 진짜 신기하다...”
요즘 A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으면 TV가 필요 없었다. 영화보다 영화 같은 현실이 집안에서 펼쳐지는 통에 옆구리에 아이스크림 한 통 끼고 소파에 앉아 균열 사이로 빠져나오는 밤의 세계 생물을 관찰하기에 바빴다. 오늘도 그랬다. A의 옆구리엔 3분의 1가량 비워진 1L짜리 아이스크림 통이 아슬아슬하게 놓였다. A는 아이스크림을 양껏 뜬 숟가락을 입에 물고 쪽쪽 빨며 균열을 노려보았다.
“이야-”
이미 60cm정도 벌어진 균열 사이로 사람을 홀릴 듯 아름다운 색을 자랑하는 물고기 떼가 줄줄이 새어 나왔다. 둥글고 큰 머리에 울룩불룩 혹처럼 불거진 살 위로 비늘이 제멋대로 박혀 기괴했다. 물고기 이마엔 판판하고 단단한 갑옷 같은 비늘이 아래로 쏟아질 듯한 머리통의 비늘을 받쳐 부서진 거대한 왕관처럼 보였다. 눈이 아플 정도로 쨍한 주홍빛, 진분홍빛, 다홍빛, 짙은 보랏빛을 섞은 쪽빛 비늘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몸통을 중심으로 시폰 셔링처럼 여리고 가느다란 지느러미가 사방을 둘러 앞과 뒤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헤엄친다기보다 지느러미를 휘둘러 굴러가듯이 저어 가는 느낌이었다. 여러 마리의 밤의 세계 생물들이 교차하며 물결을 휘저으니 겹겹이 쌓인 꽃의 수술 위에 앉은 기분이었다.
“이번엔 너무 예쁜데...?”
평소 같으면 C부터 호출하고 난리가 났을 테지만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쇼에 A는 넋이 나갔다.
“이거 봐, 이거! 아주 문제를 키워라, 키워! 쯧쯧!”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C가 귀신같이 밤의 세계 생물 냄새를 맡고 나타났다. 늘 그렇듯 널찍한 창문으로 긴 다리가 쑥 들어왔다.
“... 오- 오랜만이에요~ 봐봐요. 너~무 예쁘지 않아요~?”
멍하니 넋이 나가서 밤의 세계 생물들을 바라보며 적당히 손을 흔들어 환영 인사를 했다. 고개를 숙여 거실로 들어온 C는 예상치 못한 거실 풍경에 어이가 없었다.
“이봐! 정신 차려!”
C는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A의 머리통을 가볍게 쥐고 흔들었다.
“으아-악-!!!! 뭐 하는 짓이에요?!”
깜짝 놀란 A는 입에 물고 있던 숟가락을 뱉어냈다. 공중으로 날아간 숟가락은 거실 바닥에 떨어져 물수제비처럼 두어 번 통통 튀어 갔다. 비명을 지른 A는 살기를 띠고 C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아예 밤의 세계 생물한테 영혼까지 팔겠다?! 힘들게 구해놨더니 헛짓거릴 하고 앉았네.”
“봐요. 세상에~ 너무 예쁘지 않아요? 밤의 세계 생물 중에 이 정도로 예쁜 게 있으면 키워도 괜찮지 않을까요?”
A는 C가 머릴 흔들었던 사실조차 잊은 듯 황홀하게 균열 사이를 날아다니는 밤의 세계 생물을 바라보았다.
“전에 해준 이야기는 기억해? 조심하라고 한 경고는 어디로 들은 거야?”
C는 귀찮은 듯 손가락을 휘휘 저어 밤의 세계 생물들을 한데 모았다. 모아 놓으니 은은한 노란빛이 배어 나와 고기능 무드 등처럼 색색이 맑은 빛으로 반짝였다.
“어머나~ 진짜 얘들은 데리고 있으면 안 될까요~?”
“... 얘네가 환하게 뿜는 게 네 생명이라도...?”
“... 네?”
세상 귀찮은 듯 C는 모자 아래 뒤통수를 긁적였다.
“얘네 인간을 홀려, 너처럼. 대부분 일주일이면 다 죽어 나가지. 넌 한 달 정도 가겠네. 에너지도 크니까. 얘네 양초로 살다 죽고 싶어?”
“... 뭐요?!”
소스라치게 놀란 A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제부터 방치한 거냐? 벌써 2~30마리쯤 모인 거 같은데. 용케 눈은 뜨고 있네.”
“잠깐, 잠깐! 이 빛이 다 제 생명이라고요?!”
“얘넨 지난번 털뭉치보다 질이 나빠. 걔넨 플랑크톤 수준이라면 얘넨 거머리 수준이야. 당해보면 위협이 확 다가오지.”
C는 균열 사이로 날아다니는 밤의 세계 생물을 다 모은 후 손을 꽉 쥐었다. 밤의 세계 생물들은 한 줌의 작은 점이 되어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허공이 위아래로 일렁이며 빙빙 돌고 나니 전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
그제야 A는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몸에 기력이 없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오, 아이스크림...!”
그러거나 말거나 C는 바닥을 굴러다니던 아이스크림 통을 냉큼 들었다. 꽤 많이 남은 걸 확인하고 기뻐하며 숟가락을 찾아 어슬렁어슬렁 주방으로 향했다.
“저는 언제 괜찮아지나요...?”
기력이 하나도 없어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A는 사력을 다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자업자득이지. 밤의 세계 생물 구경하며 간식을 꽤 먹은 덕에 살은 줄이나 알아.”
C는 옆구리에 아이스크림 통을 끼고 A 옆에 앉았다. 숟가락으로 뽀얀 바닐라맛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스푼 떠서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에 던져 넣었다.
“으음~!”
허공은 빠르게 빙빙 돌며 사방으로 요동쳤다.
“저, 저도 좀...!”
점점 기력이 쇠한 A는 바들바들 떨리는 팔을 간신히 들어 손을 아이스크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타까운 몸짓을 바라보던 C는 정성껏 아이스크림을 예쁘게 한 스푼 떠서 A의 입에 넣어주었다. A는 갓난아이처럼 입술을 오물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녹여 먹었다.
“내가 뭐랬어? 균열이 열리면 빨리 부르랬지?”
C는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몇 번 휘휘 저었다. 벌어졌던 균열 주변에 이제는 익숙한 바느질 자국이 이리저리 오가더니 벌어진 균열이 천천히 닫혔다.
“말 안 듣는 어린이는 오늘 밤 밤의 세계 나머지 공부를 해야겠군.”
“... 네...?”
이젠 눈꺼풀 들 힘조차 없는 A는 바들거리며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일어나. 밤의 세계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