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위하여(For the Story)

제1장 이번 생엔... #1 눈을 감으면 도시는 물에 잠긴다 -20

by 단영화

호기로운 C는 얼이 빠져 맹하니 넋 놓은 A를 일으켰다. 창백하고 긴 손으로 어깨 밑을 받쳐 들고 적당히 아무렇게나 세워두었다. 무척 성가신 듯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을 가늘게 눌러 흘긋 보았다.


"밤의 세계요...?"

"그래. 앞으로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날 텐데 미리 알아 두는 게 좋겠지."

"... 균열로 들어간다는 이야기... 인... 거죠...?"


어영부영 일어선 A는 어딘지 모르게 음험한 C의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과 균열을 번갈아 보았다. 이미 균열은 닫힌 상태였지만 날리 없는 먼지 가득 낀 불쾌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곧 어떤 위험을 맞닥뜨릴지 모를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 거라는 생각에 A는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뭘 떨고 그래? 밤의 세계라고 특별할 게 있을 거 같아?"


비 맞은 강아지처럼 A가 오들오들 떨자 C는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재밌어 죽겠다는 듯 껄껄 대며 가늘고 긴 팔을 포개 재킷 위로 몸을 휘감았다. 거의 한 바퀴 가까이 두른 두 팔이 새끼줄처럼 C의 몸을 빙 둘렀다.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요. 조금 전까지 밤의 세계 생물 때문에 죽을 뻔 했던 거 기억은 하세요?"


긴장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꾹꾹 눌러가며 C를 살풋 흘겼다. 거실 천장에 닿을 만큼 큰 C는 허리를 구부려 간신히 머리를 들 공간을 마련했다. A가 가련하게 떨면서 노려보았지만 C는 무섭기보다 안타까운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때는 내가 없었지. 지금은 내가 있잖아. 넌 밤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블랙카드를 얻은 거라고."


C는 호쾌하게 으스대며 안심시켰지만 A는 말없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뿐이었다.


"자자, 그만 떠들고 가자고!"


대충 얼버무리며 귀찮은 듯 A의 등을 떠밀었다.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으로 허공을 몇 번 휘적이자 막아놓은 균열이 단번에 입을 쩍 벌렸다. 벌어진 틈으로 익숙한 물줄기가 흘렀다. 졸졸졸 쏟아지던 물줄기는 순식간에 거실을 물바다로 만들었다. A는 이 광경이 놀랍지도 않다는 사실에 놀라며 C를 보았다.


"잠깐만, 기다려."


균열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집 안 전체를 꽉 채웠다. 물이 전부 다 차올라 밤의 세계가 되었다. A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귓가에 물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눈을 뜨니 아주 익숙한 밤의 세계가 들어왔다. C는 다 열려도 채 70cm가 되지 않은 균열 안쪽을 살폈다.


"좁군. 가능하면 균열은 생기지 않는 게 좋지만 작을 땐 출입이 불편해서 곤란하단 말이야."

"이리로 들어갈 거예요?"

"그럼 어디로 들어가? 너는 밤의 세계 생물이 아니잖아. 문을 열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이방인이라고."


균열의 크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을 위아래로 빠르게 통통 튕겼다. 허공이 빙글빙글 돌면서 빠르게 소용돌이쳤다. 머리를 먼저 들이미니 어깨가 걸렸고 팔을 먼저 넣으니 머리가 걸렸다.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낑낑 대며 몸을 욱여넣으려고 애썼다.


"... 도와드릴까요?"

"자, 잠깐만...! 기다려봐...!"


어떤 방향으로 들이밀어도 소용없으니 C는 포기한 듯 균열에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못마땅하게 균열을 보던 C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잠시 고민했다.


"흐음- 이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혼자 중얼거리던 C는 입고 있던 고급 정장 재킷을 벗었다. 탁탁 털어 먼지를 털어내고 긴 세로 방향으로 두 번 곱게 접었다.


"자, 들고 있어."


멀뚱이 보던 A에게 재킷을 맡긴 후 긴 다리를 쩍 벌린 상태에서 상체와 머리를 사방으로 둥글게 돌리며 몸을 풀었다. 뼈끼리 부딪치며 우둑 거리는 험악한 소리가 난무했다. 특히 팔다리가 가늘고 긴 C의 관절이 제각각 움직이는 장면은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었다.


"시원하다~ 좋아."


우둑-!


잠시 후 C는 왼팔을 앞에서 뒤로 돌려보더니 시원하게 뽑아버렸다.


"아-악-!!! 뭐 하는 거에요?!"

"자, 받아."


당황해서 사색이 된 A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히려 C는 A의 호들갑이 성가신 듯 이상하게 보며 뽑은 팔을 건넸다.


"잘 들고 있어. 잃어버리면 큰일 나."


건네받은 팔을 잃어버릴 세라 꼭 끌어안았다. 새파랗게 질리도록 놀란 A는 말없이 빠르게 고개를 세로 저었다. C는 균열로 다가가 다시 머리를 밀어 넣었다. 허공이 균열 사이로 쑤욱 들어갔다. 다행히 이번엔 어깨가 걸리지 않았다. 어깨가 들어가고 C는 균열 속으로 들어갔다. 기괴하기 그지없는 장면에 A는 할 말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다.


"뭐 해? 안 와?"


균열 속으로 사라졌던 C가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균열 사이로 쾌쾌하고 텁텁한 냄새가 코를 찔러 정신이 혼미했지만 균열 틈으로 머리만 덜렁 내민 C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 가요!"


A는 주춤거리며 균열로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냄새는 점점 더 강해졌다. 쾌쾌하고 텁텁한 데다 끈적끈적하고 불쾌해 보였다. 먼저 손을 쑤욱 넣었다. 흡사 진득해서 반 고체화된 고기 육수에 손을 담그는 기분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고기 육수는 고소하지만 균열 속은 두리안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악취를 풍긴다는 것이다. 뒤로 물러나고 싶은 충동이 강렬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거부와 거절, 불쾌, 기만과 모욕을 섞어 가장 더러운 기분을 뭉쳐 놓은 듯했다.


"눈 딱 감고 전진! 앞으로 걸어!"


균열 틈으로 팔을 넣은 A가 옴짝달싹 못하니 C는 윽박질렀다. 팔을 더 깊이 넣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A는 눈을 꼭 감고 균열로 몸을 던졌다. 팔과 얼굴, 머리가 파묻히니 세상에게 모욕당하는 기괴한 기분이 덮쳐왔다. 강력한 이질감에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럼에도 발끝에 힘을 줘 균열 속으로 파고들었다. 온몸이 균열 틈바구니에 들어와 부유했다. 밤의 세계에서 느꼈던 자유로움이 아니라 온 세상에 모욕당하는 수치스러움과 좌절감, 패배감, 혼돈과 혼란이 몰려왔다. 호흡이 가빠졌다. 속이 뒤틀려 뱃속 깊은 곳이 인정사정없이 휘저어졌다. 식은땀이 흘렀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며 구역질이 올라왔다.


우-읍-!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게워내려 허리를 숙였다.


"오, 생각보다 잘 견뎠어."


균열 틈이라고 생각했던 A는 단단한 땅 위에 구역질처럼 쏟아지듯 엎어졌다. 흙바닥 위에 대자로 엎드린 채 눈만 꿈뻑거렸다. 양손으로 단단한 땅을 훑었다. 사방이 물로 가득 찼기 때문에 어차피 흙먼지는 일지 않았다. 자갈과 모래, 흙이 뒤섞여 손바닥을 간질였다. 팔을 쭉 뻗으니 손끝에 잡초가 걸렸다. 죽을 것만 같던 조금 전의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쩌면 꿈이었을까 싶어 볼을 꼬집었다. 꼬집은 자리부터 아릿하게 고통이 전해졌다. 확실히 꿈은 아니었다.


"환영합니다~ 몇 백 년 만에 밤의 세계에 온 손님이에요~"


고개를 드니 근처 나무 아래 C가 자리 잡고 앉아 A의 몰골을 감상 중이었다.


"여기가... 밤의 세계...?"


몸을 일으켜 앉은 A는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고요하고 푸릇한 물빛이 사방을 비추었다. 물로 가득 찬 밤의 세계는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만큼 수면이 멀었다. 하늘에 뜬 거대한 달이 밤의 세계를 비췄다. 창백하고 푸르스름한 빛으로 밤의 세계를 아울렀다. 거대한 달 주위로 붉은빛, 보랏빛, 검은빛 세 개의 작은달이 어머니 달의 그림자와 궤도를 오갔다. 달그림자 뒤로 윤슬이 별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거대한 달 아래 은은한 은빛 벽을 두른 성채가 위용을 뽐냈다. 성채의 그림자 아래 크고 작은 산과 언덕, 모든 길이 성채를 향했다. 거대한 거미줄처럼 반짝이는 밤의 세계는 장관이었다.


"여기는 밤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야. 지난 균열이 열리기 전 밤의 세계에서 종종 달을 향해 제를 올리던 곳이지. 신들이 거의 남지 않은 지금은 쓸모없어졌지만."


C의 말처럼 나무 아래로 밤의 세계가 전부 내려다 보였다. 밤의 세계가 한눈에 보일 정도이니 달이 거대해 보인데도 이유가 있었다.


"... 균열 지날 때 원래 그런 거예요?"


말없이 밤의 세계를 바라보던 A는 문득 입을 열었다.


"어떤 느낌이었어?"

"... 아주 더러운 기분이요. 세상의 모든 존재가 나를 짓밟는 듯한 아주 역겨운 기분이었어요."

"그 정도면 양호해! 역시 넌 잘 지나올 줄 알았어."

"... 네?"

"균열이 열린다고 아무나 밤의 세계에 오면 큰일 나지 않겠어? 10명 중에 8명은 죽어."

"... 네?!"

"일종의 방어벽인 셈이지. 일반적인 사람은 균열을 볼 수 없고, 인연이 있어서 균열을 볼 수 있는 사람 중 하나는 현세의 오염 때문에 균열을 넘어오며 정신부터 죽어. 나머지 하나는 오염이 심하지 않아서 살아서 넘어오는 경우지. 바로 너처럼."


무척 기쁜 듯 엄지를 척 드는 C였다. 순간 욱하는 마음에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그럼 제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소풍 가듯이 저 보고 균열을 넘어오라고 한 거예요?"

"뭐, 그렇긴 하지만. 난 절대 네가 죽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고."

"무슨 근거로 제가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도대체?"

"어느 쪽이든, 순수하잖아."

"... 고작 그런 걸로...?"

"고작이라니! 현세에 순수하다는 건 진짜 어려운 거야. 너 그거 대단한 거다?"


C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킬킬대며 웃었다. 낮게 울리는 거친 음성이 묘하게 들뜬 듯했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만 년도 넘게 사는 동안 계속 그렇게 대책이 없었나요...?"

"이 정도 살면 딱 감이라는 게 온다니까? 날 믿어."


불신의 눈초리로 C를 보던 A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래 사는 동안 위험 감지 능력이 크게 잘못된 듯했다. 한동안 C의 안테나는 믿지 않아야 인생에 난이도를 낮출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저기 은색빛 성채 보여?"


둔한 건지 약은 건지 C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멀리 은빛 성채를 가리켰다.


"저건 뭐예요?"

"밤의 세계에 살던 고대 신들의 성채야. 너희 세상에서 마땅한 이름을 찾는다면 악마 정도일까? 딱히 해를 끼친 건 아닌데 참 이미지가 안 좋은 양반들이었지. 어쨌든 지금은 다 떠나고 없지만."

"다 어디로 간 거예요?"

"밤의 세계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지 오래야. 지난번 균열이 열렸을 때 타격을 심하게 받는 바람에 존재할 질량 자체를 잃어버리고 있거든. 대부분 신들이 살 수 있을 만큼 에너지가 큰 차원으로 이동했어."

"전부터 궁금했는데 신들이 살기 위해서 조건이 필요한가요? 밤의 세계에 살 수 있도록 방법을 찾을 수도 있잖아요?"

"알아듣기 쉬운 말로 설명하자면, 네가 지구에서 살려면 지구에 가해지는 압력이 필요하잖아. 신들도 마찬가지야. 밤의 세계에 살기 위해서 일정량 이상의 힘이 필요해. 지난 균열 때 밤의 세계가 지금처럼 물에 잠기니까 신들이 필요한 만큼의 힘이 줄어든 거야. 밤의 세계에 가해지는 힘이 평균적으로 지구보다 10배에 가까운데 물이 차면서 100분의 1로 줄어든 거야.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타 차원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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