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위하여(For the Story)

제1장 이번 생엔... #1 눈을 감으면 도시는 물에 잠긴다 -21

by 단영화

이야기를 끝낸 C는 A를 흘긋 훔쳐보았다. 태어나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A는 눈을 떼지 못했다. 정신이 팔려 C가 한동안 지그시 바라보는 줄도 몰랐다.


“그렇군요..."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은색 성채 아래 도로 주변으로 희미한 실루엣이 드러났다. 거미줄처럼 얽힌 길과 길 사이에 둥근 껍데기가 번들거리며 존재감을 뽐냈다. 귤 알맹이처럼 둥그스름해서 여러 개 모인 모양이 개미집처럼 올록볼록 입체적이었다.


”저건 뭔가요?“


A가 은색 성채 아래 길 사이를 가리켰다. C는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을 돌려 스윽 바라보았다. 허공이 빙빙 돌며 잠시 길 사이에 머물다가 이내 다시 A를 향했다.


”직접 보는 편이 더 재밌을 거야.“


C는 허리를 곧게 펴고 바르게 섰다.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을 내밀었다. 정중한 태도에 A는 웃음이 났다. C는 가느다랗게 웃는 A를 못 본 척 뻔뻔하게 턱을 높이 들었다. 우아하게 고개를 젖히고 다시 정중하게 허리를 살짝 굽혀 손을 내밀었다. 킥킥 대던 A는 마지못해 C가 내민 손을 잡았다.


”가시죠, 밤의 세계에 온 손님.“


밤의 세계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에서 C는 아무렇지 않게 뛰어내렸다. 가볍게 허공으로 뛰어오르니 하얗게 물거품이 일어났다. 손을 맞잡은 A는 자연스럽게 C의 뒤를 따랐다. 몸이 떠오르니 묵직하고 낯선 감각이 몸을 얽매였다. 언덕 아래로 하강하는 둘은 멀리 보이는 풍경을 천천히 구경할 만큼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자유낙하 중인 조약돌처럼 물살을 가르며 점점 아래로 향했다. 거미줄처럼 가느다랗던 도로는 거리가 가까울수록 점차 눈에 익은 모습으로 변했다.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에 흐릿하게 지워진 차선, 교차로마다 선 신호등과 가로수까지 매일 보던 풍경이었다. 도로 근처 건물도 마찬가지였다. 흔하게 보던 작고 낮은 오래된 2층 건물부터 높은 아파트, 주상복합까지 딱 A가 알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 이건...?!“


깜짝 놀라 A가 소리쳤다. 당연히 나올 반응이라 C는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지?“

”여기 밤의 세계 맞아요?! 저희 동네랑 똑같이 생겼는데요?!“

”밤의 세계는 네가 사는 차원 세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했지.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아. 밤의 세계란 건 애초에 타 차원의 찌꺼기에 불과하니까. 지금 네가 본 풍경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어느새 둘은 도로 위로 가볍게 내려왔다. 두 발이 아스팔트 위에 닿았다. 꽤 높은 곳에서 떨어졌지만 작은 보도블록 위에서 뛰어내린 것처럼 가벼웠다. 둘은 따라 그리던 물보라의 포물선만 흔적을 남겼다. 주변을 둘러보며 몇 걸음 떼니 흔적마저 A가 만든 물살에 사라졌다.


”와...! 물속만 아니었으면 밤의 세계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A는 풍경을 둘러보며 두 팔을 둥글게 휘둘렀다. 처음엔 물의 저항으로 팔이 제법 무거웠다. 힘겹게 몇 바퀴 돌리니 가속도가 붙었다. 속도가 붙으니 다시 물살을 일으키며 손과 팔로 물거품을 토해냈다. 장난스러운 몸짓에 A의 몸이 가볍게 둘렸다. 아스팔트에 붙였던 두 발이 스르륵 저절로 떨어졌다.


”사실 두 세계는 밀접하게 연결됐어. 네 차원의 일이 밤의 세계에 흘러들고 밤의 세계의 일이 네 차원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주지. 지금은 너의 세계가 밤의 세계에 속하지 않아서 볼 수 없을 뿐이야. 옛날 어느 때에는 세계 사이에 경계가 흐려서 모든 에너지와 영혼, 생물들이 하나의 세계에서 어우러질 때가 있었다고 하지. 오래 산 나조차 가늠하지 못할 만큼 아득히 먼 이야기지만 말이야.“

”아... 요즘 자주 보이던 하늘을 나는 금붕어가 이상한 게 아니었나 봐요.“

”네 차원 세상이 밤의 세계처럼 물로 찼다고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지. 여기선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그럼 귀신을 본다던가 시간 여행이라든가 미래를 예언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겠네요?“

”켈켈켈-! 당연한 거 아니야? 나도 귀신인데? 시간 여행은 인간이 시간을 기준으로 세상을 가늠하니 당연히 인간 기준의 단어일 뿐이야. 너희 인간이 설명하는 시간 여행의 개념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차원 간 이동을 매일 하는 나한테 별 의미 없는 이야기지. 과거의 일인 시간 여행이 의미 없으니 당연히 미래 일인 예언도 의미가 없겠지. 인과 연을 이해한다면 예언 따위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정확하게 세상을 이해할 수 있어.“

”아... 그렇군요.“

”TV 프로그램에 나와 이상한 소릴 하거나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선지자 노릇을 하거나 혼자 망상의 세계에 빠져 정신병 판단을 받는 사람 중에 간혹 밤의 세계를 보고 듣고 느끼는 이들도 있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유전 정보 중에 인간이 아닌 다른 이종, 특히 인어의 유전 인자를 받은 사람들이야. 현대에 인간의 육신은 인어의 유전 정보를 해독할 수 없을 만큼 나약해졌어. 밤의 세계에 끌려다니다 생을 마감하는 거지. 어떤 종이든 세월을 이기긴 어려운 법이야.“

”아... 저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너는 분명 견딜 수 있을 거라고 말했잖아.“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이 위아래로 통통 튀었다. 어쩐지 보이지 않는 허공 위로 익살스러운 C의 표정이 느껴졌다.


”하하... 그래도 다음부터는 절대로 저를 과대평가하지 말아 주세요... “

”약한 소리 하기는! 믿고 있었다니까!“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C는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으로 A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허공으로 떠올랐던 두 발이 다시 아스팔트 위에 딱 달라붙었다.


”주의할 점이 하나 있어. 네가 밤의 세계에 손님으로 올 만큼 그릇이 된다고 해도 네 일이 아닌 일을 함부로 타인에게 발설하면 안 돼. 인과 연이란 필요로 수많은 사건과 영혼을 엮는다. 그건 나조차 함부로 어길 수 없어. 대단한 신이라고 한들 인과 연으로 강하게 묶은 일을 멋대로 풀고 엮을 수 없는 거야. 네가 임의로 개입해서 비틀어 버린다면 일의 중요성에 따라 한순간에 순살 당할 수 있다. 그러니 네가 관련됐거나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만큼만 이야기해야 한다. 알겠지?“

”아, 네.“

”안 지켜서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땐 나도 어쩔 수 없어. 모든 일은 물 흐르듯이 흘러갈 것이고 주어진 각자 주어진 역할이 있으니 제 분수에 맞게 살아가면 되는 거야.“


심각한 이야기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랭했다. C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심각한 분위기로 몇 번이나 반복해서 A에게 주의점을 강제 주입했다. 질려서 절대 조심하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반복해서 받고 나서야 C는 안심한 듯 평소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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