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패션과 총기난사

PVC 트렌드를 대하는 새로운 관점

by 다예나믹dynamic

폴리염화비닐. 그러니까 PVC가 트렌드라고 난리다. 속이 훤히 비치니 시원해보인다며 여름철마다 반짝 인기를 끌긴했지만, 이번 시즌에는 초봄부터 패션계의 주목을 독차지했다. 그야말로 빵 뜬 수준이다.


한편에선 수십만원짜리 비닐봉지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반대에선 유명브랜드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난리의 복판에 있는 셀린의 PVC 백은 60만원대. 정확히는 안에 들어있는 카드지갑을 포함한 가격이다. 셀린의 대표적인 백, 러기지의 가격은 300만원대다. 카드지갑은 40~50만원대다. 카드지갑에 조금 더 보태면 소위 ‘잇 백’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셈이다. 패션 브랜드의 입장에서 PVC는 힘들게 쌓아놓은 브랜드 이미지에 손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가격진입장벽을 낮춰 밀레니얼 세대를 더 폭넓게 끌어들일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이다.

아무데나 놔둬도 화보가 되는 셀린의 PVC 백. 안에 든 가방은 세트로 구성된 카드지갑이 아닌 셀린의 다른 가방이다.


기술발전도 트렌드에 한 몫했을거다. 두껍고 뻣뻣한데다 박음질을 하면 찢어지던 예전의 PVC와 달리 요즘의 PVC는 물처럼 유연하면서도 엄청나게 질기다. 사용하는 실의 탄성도 더 좋아졌을거다. 샤넬이 PVC 소재의 망토끝에 레이스처럼 섬세한 비닐 프릴 장식을 달 수 있었던 것도, 발렌티노가 연약한 PVC 소재에 스파이크 모양의 금속 스터드를 박을 수 있었던 것도 다 이런 기술발전 덕분이다.


2018 S/S 시즌 프레젠테이션에서 본 샤넬의 PVC 케이프, 발렌티노 락스파이크 백의 PVC 버전.


그런데 이런 비즈니스적 관점말고, PVC 트렌드를 좀 새롭게 보게 된 일이 있다. 미국 플로리다주에 있는 마조리 더글라스 고등학교가 전교생에게 투명한 백팩을 메도록 규정한 일이다. 지난 2월 14일, 평소라면 소년소녀들이 풋풋한 사랑을 고백했을 발렌타인 데이. 이 학교에서는 17명이 사망한 끔찍한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총기 규제 대신 교내 보안 강화책을 내놓은 데 따라 더글라스 고교는 모든 학생들의 소지품을 모든 이가 볼 수 있도록 투명 가방을 아이디어로 내놨다. 보도에 의하면 학생들은 사생활을 잃고 매일 벌을 받는 기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3억5천만 정(미등록 총기를 합치면 이보다 훨씬 많다)이 넘는 총기가 미국 전역에 퍼져 있고, 트럼프 정부가 있는 한 미국의 총기 규제는 요원해 보인다.


투명한 백팩을 메고 등교하는 마조리 더글라스 고교 학생들.

당장의 자구책으로 투명한 PVC 백을 메고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마침 가장 ‘힙’한 트렌드라고, 주위에 패션 좀 좋아한다는 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PVC 백을 들고 다닌다면 위로가 될까? 뭐 그런 생각을 좀 했다. 총기가 없는 나라에 사는 1인으로서 PVC 아이템을 보고 시각적 효과나 비즈니스적 효용이 아닌, 목숨과 직결된 ‘보안’의 개념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신선하면서 안타깝고 그랬다는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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