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by dynamicyun

조금이라도 가난에 가까워진 내 모습이 창피했다.
이전보다 궁핍해진 내 모습을 두고 괜찮아 보인 척 했지만,
사실 시간이 지나고 더는 나아질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기 시작하자
내 모습이 창피하고 초라해 보였다.

정부에서 보조금을 수급받지 않으면
무언갈 지불할 수 없는 나의 신세가 몹시도 부끄러웠다.
그 거무죽죽하고 오만했던 나의 민낯을
그렇게 수급자가 되어 지원금을 손에 쥔 채 마주하게 되었다.

이상적인 미래를 끝없이 상상했다.
그 상상이 연기처럼 사라지면
마주하기 싫었던 현실이 날 계속해서 덮쳐왔다.
우울했다. 그래서 우울한 것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서야 모든 꺼풀이 벗겨진 것이다.
가난하고 궁핍한 다른 이들의 삶을 안타까워하고
연민했던 나의 모습 뒤에는
이 지긋지긋한 삶도 언젠간 끝이 날 것이라는 착각과 함께
나는 결코 저렇게 살지 않을 것이라는 어떤 확신의 자아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 자아와 마주하게 되자 조바심이 났다.
남들보다 아니면 남들만큼 열심히 노력하면 이 삶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노력을 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게 날 채찍질하고 손가락질해야 열심을 낼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잠만 잤던 탓일 것으로 생각했고
일어서면 된다고, 그렇게 일찍 일어나 어딘가로 향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현실은 나설 곳이 없었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우울증약을 몇 알 더 추가해 목구멍에 털어 넣어도
무언가에 미친 듯이 집중하려 해도 그 어느 것도 되지 않았다.
노력과 성실의 문제가 아니었다.
책을 펴고 펜을 잡고 어떤 것에 몰두하려 해도
빌어먹을 심장이 뛰고 좌불안석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초조했다.

나는 왜 이런 인간이 되었을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글을 쓰는 것만 할 수 있게 돼버린 내 존재가 혐오스럽기 까기 했다.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시 한 편을 읽을까.
그렇게 자책과 비난이 난무하는 나의 삶 끝에
결국 어떤 시 한 편이 도달했다.
김사인 시인의 지상의 방 한 칸 이라는 시였다.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이런 삶 또한 내 곁에 존재해 이렇게 시로 찾아와 주었다고 생각했다.
애증 하는 돈이 굴러온 것도 아니고
몇백 원이 전부인 통장에 누군가가 계좌이체를 해준 것도 아니다.
이전보다 빈곤해진 나의 형편이 나아진 것도 아닌데
겨우 시 한 편 읽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따뜻했다.

인생은 중위소득 45% 이하의 가구를 면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작 시 한 편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결코 타인의 가난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구나,
다만, 나의 고통을 느끼면서 타인의 아픔을 가늠해야 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함께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아픔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문장이
나에겐 더 큰 위로가 되었다.

오늘도 피상적 세상은 화려하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가난은 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당사자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빈곤과 결핍을
타인에게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세상이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본인의 냉혹한 현실에 대해 표현조차 하지 못하는,
그 어떤 서류하나 작성하지 못해 복지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빈곤층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제도가 가난한 모든 것을 감싸 안지 못한다면,
우리가 그들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느낀 고통과 절망의 크기를 가늠해야 한다.
내가 힘들었던 만큼
어떤 누군가도 이보다 더 큰 좌절의 무게를 들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겠구나.
나의 고통이 언젠간 누군가의 고단한 삶 끝에 가닿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오늘 나의 고통과 좌절은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있다.
내가 못나서, 내가 무언갈 더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누군가의 삶을 더 이해하기 위해
타인의 아픔을 끌어안기 위해 나는 오늘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렇게 가난해진 채 풍요로워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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