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차별주의자의 극단적 차별은 순수한 것인가
인간은 살아가며 사회와 문화 그리고 삶 자체의 구조상의 많은 문제를 지각하며 살아간다. 문제의 지각은 고민으로 이어지고 고민을 하다 보면 해결책을 강구하게 되고 해결방안들은 모색하여 정리하다 보면 사상 또는 철학이 되거나 더 나아가 이데올로기로 가게 된다. 어떻게 보면 종교의 탄생도 인간 본연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며 필연적으로 인간이 지니는 한계를 지각하고 그 한계에 대한 낭패감에서 출발하여 한계를 초월하고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종교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사상과 철학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본인이 억압과 핍박의 대상으로서 구조의 문제를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제3자의 입장에서 각자 소견에 근거해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사회를 바라보며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필요성의 자각은 곧 해결방안의 모색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사상과 철학으로 발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사기도 하며 더 널리 퍼져 나가기도 한다. 이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매우 긍정적인 발걸음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자 불공정한 핍박을 줄이고자 하는 정의 구현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종교 또는 사상과 철학이 전파되어 이데올로기화 되어가는 단계에서 주로 발생한다. 보통 사상의 출발점은 본질에 대한 고민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사람의 치열한 고민과 여러가지 사고의 반복과 시행착오 끝에 그것을 구조적으로 정리한 사상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쉽지도 않으며 정말 그것이 정답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되물음, 그리고 논리적 완결성을 위한 지독한 훈련을 필요로 하기에 쉽지 않은 과정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상이 그러한 고민을 많이 해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며 단순히 삶의 불편함만을 느껴가며 살아가던 대중에게 전파될 때에는 그 본질과 논리적 구조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을 때가 많다. 물론 철학과 사상은 전파되어야 철학과 사상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한 사람의 고민에서 끝나버린 문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없고 사람들이 가진 고민과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파의 필요성과 본질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 간의 교착상태는 특정 사상이 일반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고 조직화되는 데에서 발생한다. 철학과 사상은 그것이 가진 순수성을 관철시키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으며 이를 지탱하기 위한 조직화의 움직임은 수단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사고와 개념을 충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불특정 대중에게 전파될 때 철학과 사상은 그들 스스로를 보호하며 그들이 권력을 쟁취하고 기득권을 챙기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릴 때가 많다. 준비되지 않은 그들은 자신들의 분을 풀어줄 명분을 찾아오던 이들이며 논리보단 감정에 동요되어 움직이고 정의보단 자신의 안위와 자기영역 구축에 온 관심을 쏟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철학과 사상이 전파되고 이를 중심으로 조직화되게 된다면 사상의 본질이라는 목적과 조직화라는 수단이 그 역할을 뒤바꾸어 버린다. 즉, 자신들의 힘인 ‘조직’이 목적자체가 되며 철학과 사상의 본질과 순수성이라는 목적은 ‘조직과 아군’이라는 것에 대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모든 사상과 철학 또는 종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본질왜곡은 이렇게 일어난다.
일부 비차별주의자는 오히려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의 인권을 뭉개버리는 극단적 차별주의자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고 자신들의 한계와 불완전성의 낭패감에서 출발해 신을 찾고자 하는 일부 종교는 신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고 발전과 성공을 지향하며 자신의 완전성과 명분을 위한 수단으로서 신의 이름을 이용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출발한 것이 다른 누군가의 인권을 짓밟기도 하며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개념은 곧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은 말살하고자 하는 의지로 왜곡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어하는 진리에 대해 그 어떤 고민도, 의심도 하지 않는다. 아니,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이데올로기라는 틀 안에 두어 그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자신을 규정하고 싶어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데올로기나 사상과 철학은 보통적 개념에서의 철학과 사상일 수도 있지만 꼭 거창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이 될 수도 있으며 자신이 지지하는 무언가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의 가문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친우들과 형성하는 사회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 늘 끊임없이 질문하며 살아가야 한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믿고 싶은 것이 단순한 자기위로를 위한 얄팍한 수단이지는 않은가. 과연 내가 정의라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해보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감정적 끓어오름이 충분한 논리와 본질적 명분이 있어 그것들로 지탱되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고민들이 없다면 어쩌면 여러가지 사상과 철학의 본질을 왜곡시키며 자기 감정해소의 수단으로만 이용하고 소비하는 당사자가 되어버릴 수 있다. 인간은 일반적인 다른 생물과 차별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라 불리우는 특징 지키기를 지향해야 하며 나와 훗날의 내 후대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불공정한 핍박을 지양하고 정의를 위해 한 걸음 나아가야 하고 하나의 객체로서 미칠 수 있는 매우 큰 파급력에 대한 책임감을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우리가 해내가야 할 끝 없는 고민과 회의, 그 고민은 비록 당장의 정답을 가져다 주지는 않더라도 절대로 헛되지 않은 사유로 남을 것이다.